은퇴한 '작은 거인'은 왜 남쪽으로 갔을까? - 중국 개혁개방의 돌파구를 마련하다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8. 22. 09:03
[종횡만리,성시인문(縱橫萬里-城市人文) ⑮] 과거와 미래 중국 경제 발전의 바로미터: 광둥(廣東) 선전(深玔) (글 : 한재혁 전 주광저우 총영사)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리(萬里)'였다. 만리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2024년 8월 22일은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總設計師)라고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의 탄생 120주년이 되는 날이다. 같은 혁명 원로이자 신중국 수립에 큰 역할을 한 마오쩌둥(毛澤東)이 터를 닦고 새 집을 만들었다면 덩샤오핑은 그 집에 가구를 넣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덩샤오핑과 가장 밀접한 지역으로는 출생지인 쓰촨 광안(廣安)이나 국공내전 말기의 허베이 시바이포(西柏坡)를 들 수도 있겠으나, 개혁개방의 상징인 경제특구 광둥 선전(深圳)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소련과 동구권의 개혁 열풍, 6.4 천안문 사건 등 복잡한 국내외 정치 상황 속에서, 3번 실권했다 3번 부활했던 중국의 지도자 - 오뚜기(不倒翁) 덩샤오핑은 1989년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의 딸 덩롱(鄧榕)이 쓴 회고록(我的父親鄧小平)에 따르면 그가 은퇴한 11월 9일은 아침부터 비가 왔고, 그날 오후 중국 공산당 중앙위 회의에서 덩샤오핑의 군사주석직 사임 요청안을 가결했다. 덩샤오핑이 직접 쓴 사임요청서는 다음 날 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에 게재되었다. 그는 '나의 평생소원은 몸이 아직 건강할 때 직무에서 물러나는 것', '은퇴 후에도 당과 국가의 업무에 충실할 것', '우리의 개혁개방은 이제 걸음마 단계로, 우리의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다(任重道遠)'라고 강조했다.
사임요청서 중의 '일선에서 물러나도 역할을 하겠다'는 말을 실천하듯, 그는 약 2년 후인 1992년 1월 17일, 중앙 지도층에는 알리지 않고 군과 공안, 그리고 자신을 맞이할 지방정부의 일부 간부들에게만 알린 채, 부인과 4명의 자녀 등 17명의 일행과 함께 특별기차 편으로 베이징을 떠나 남쪽으로의 여정에 올랐다. 우창(武昌), 선전(深玔), 주하이(珠海)와 상하이(上海)를 한 달 넘게 시찰한 그의 1992년 남순(南巡)은 개혁개방과 중국 현대사에 있어 큰 의미를 지닌다.
마오쩌둥(毛澤東)도 앞서 남순을 했었다. 1965년 마오는 당의 우경화 경향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글을 인민일보(人民日報)에 실으려다 이루지 못하자 상하이 해방일보(解放日報)와 문회보(文匯報)에 게재하고, 71세의 나이에 항저우(杭州)와 고향인 샤오샨(韶山), 우한(武漢)을 차례로 방문한다. 이는 1966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우한에서 촉발되는 단서가 된다.
마오 남순의 데자뷔처럼, 은퇴한 덩샤오핑은 1991년 천윈(陳雲) 등 당시 당내 실권파의 보수적 경제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인민일보에 자신의 글을 실으려다 이루지 못하자 해방일보에 글을 게재한 후 상하이로 내려갔다. 푸둥(浦東) 지역 개발 등 적극적인 경제 정책과 개혁개방의 시행을 촉진하려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어 이루어진 1992년 남순 역시 초기에는 주류 언론의 관심 밖이었으나 홍콩 매체와 선전특구보(深玔特區報) 등이 보도하고 광둥 지역민들의 적극적 환대와 지지를 받으면서, 중앙 매체 및 당과 정부가 묵인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게 된다.
남순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상징물과도 같은 50층짜리 선전 국제무역센터(深玔國際貿易中心)의 리볼빙 레스토랑 전망대에 올라 지역 내 당 간부들에게 과감한 개혁을 주문했다. 배로 바다를 건너 주하이 생물화학공장, 전자부품공장을 시찰하면서 본인의 생각을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전달했다. 이를 정리하면 6개 분야 18개 경구로 요약된다. '개혁개방은 과감하게 시도하고 대담하게 뛰어넘어야 한다; 혁명도 생산력을 해방시키고 개혁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우(右)를 경계해야 하지만 보다 방지해야 할 것은 좌(左)이다; 형식주의는 관료주의다, 시간을 내서 실질적인 일을 해야지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문을 하였으며, 이는 남순(南巡)에서 행한 언급(講話), '남순강화(南巡講話)'로 남게 된다.
남순 이후 베이징의 인민일보가 지지 논평을 싣고 당과 군부에서도 경제특구를 비롯한 개혁개방 정책에 대한 견지를 천명한다. 국내외 상황 및 당 내부 권력 관계로 지지부진하던 개혁개방이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1993년 14차 당대회와 이어 개최된 전인대는 8-9% 경제 성장과 외자 유치 계획을 인가했으며, 이후 약 10년간 세계 최대 인구대국인 중국이 10%대의 고도 성장을 이룩하는 발판이 된다.
중국 전문가 에즈라 보겔(Ezra F. Vogel) 교수는 자신의 저서(Deng Xiaoping and the transformation of China)에서 덩샤오핑을 다른 중국 지도자와 달리 마지막까지 정책적 의지를 관철하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위인으로 평가하였다. 다른 중국학 석학 오빌 쉘(Orville Schell) 교수는 남순의 목적지로 선전을 비롯한 광둥을 택한 이유와 관련, 저서(Mandate of Heaven)에서 '개혁개방의 선도 지역인 남부 특구를 방문해 개혁주의자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강경 보수파에게는 본인이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을 보여주며, 외국에는 중국 경제가 흔들리지 않고 더욱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선전은 바오안현(寶安縣)에서 1979년 시로 승격되고 이어 1980년 경제특구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선전은 1,780만 명의 인구에, 전체 GDP는 이미 몇 년 전 홍콩을 넘어섰고, 1인당 GDP는 3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과거 홍콩에 인접한 작고 가난한 어촌 마을이 개혁개방의 선도 역할을 하면서 가장 큰 수혜자로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이다. 이제는 중국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민의 도시, 유행의 도시, 부유의 도시이다. 1선 도시인 베이상광션(北上廣深: 베이징-상하이-광저우-선전)을 말할 때 베이상션광(北上深廣)이라며 선전을 광저우보다 앞에 언급하기도 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리(萬里)'였다. 만리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2024년 8월 22일은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總設計師)라고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의 탄생 120주년이 되는 날이다. 같은 혁명 원로이자 신중국 수립에 큰 역할을 한 마오쩌둥(毛澤東)이 터를 닦고 새 집을 만들었다면 덩샤오핑은 그 집에 가구를 넣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덩샤오핑과 가장 밀접한 지역으로는 출생지인 쓰촨 광안(廣安)이나 국공내전 말기의 허베이 시바이포(西柏坡)를 들 수도 있겠으나, 개혁개방의 상징인 경제특구 광둥 선전(深圳)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소련과 동구권의 개혁 열풍, 6.4 천안문 사건 등 복잡한 국내외 정치 상황 속에서, 3번 실권했다 3번 부활했던 중국의 지도자 - 오뚜기(不倒翁) 덩샤오핑은 1989년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의 딸 덩롱(鄧榕)이 쓴 회고록(我的父親鄧小平)에 따르면 그가 은퇴한 11월 9일은 아침부터 비가 왔고, 그날 오후 중국 공산당 중앙위 회의에서 덩샤오핑의 군사주석직 사임 요청안을 가결했다. 덩샤오핑이 직접 쓴 사임요청서는 다음 날 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에 게재되었다. 그는 '나의 평생소원은 몸이 아직 건강할 때 직무에서 물러나는 것', '은퇴 후에도 당과 국가의 업무에 충실할 것', '우리의 개혁개방은 이제 걸음마 단계로, 우리의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다(任重道遠)'라고 강조했다.
사임요청서 중의 '일선에서 물러나도 역할을 하겠다'는 말을 실천하듯, 그는 약 2년 후인 1992년 1월 17일, 중앙 지도층에는 알리지 않고 군과 공안, 그리고 자신을 맞이할 지방정부의 일부 간부들에게만 알린 채, 부인과 4명의 자녀 등 17명의 일행과 함께 특별기차 편으로 베이징을 떠나 남쪽으로의 여정에 올랐다. 우창(武昌), 선전(深玔), 주하이(珠海)와 상하이(上海)를 한 달 넘게 시찰한 그의 1992년 남순(南巡)은 개혁개방과 중국 현대사에 있어 큰 의미를 지닌다.
마오쩌둥(毛澤東)도 앞서 남순을 했었다. 1965년 마오는 당의 우경화 경향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글을 인민일보(人民日報)에 실으려다 이루지 못하자 상하이 해방일보(解放日報)와 문회보(文匯報)에 게재하고, 71세의 나이에 항저우(杭州)와 고향인 샤오샨(韶山), 우한(武漢)을 차례로 방문한다. 이는 1966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우한에서 촉발되는 단서가 된다.
마오 남순의 데자뷔처럼, 은퇴한 덩샤오핑은 1991년 천윈(陳雲) 등 당시 당내 실권파의 보수적 경제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인민일보에 자신의 글을 실으려다 이루지 못하자 해방일보에 글을 게재한 후 상하이로 내려갔다. 푸둥(浦東) 지역 개발 등 적극적인 경제 정책과 개혁개방의 시행을 촉진하려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어 이루어진 1992년 남순 역시 초기에는 주류 언론의 관심 밖이었으나 홍콩 매체와 선전특구보(深玔特區報) 등이 보도하고 광둥 지역민들의 적극적 환대와 지지를 받으면서, 중앙 매체 및 당과 정부가 묵인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게 된다.
남순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상징물과도 같은 50층짜리 선전 국제무역센터(深玔國際貿易中心)의 리볼빙 레스토랑 전망대에 올라 지역 내 당 간부들에게 과감한 개혁을 주문했다. 배로 바다를 건너 주하이 생물화학공장, 전자부품공장을 시찰하면서 본인의 생각을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전달했다. 이를 정리하면 6개 분야 18개 경구로 요약된다. '개혁개방은 과감하게 시도하고 대담하게 뛰어넘어야 한다; 혁명도 생산력을 해방시키고 개혁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우(右)를 경계해야 하지만 보다 방지해야 할 것은 좌(左)이다; 형식주의는 관료주의다, 시간을 내서 실질적인 일을 해야지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문을 하였으며, 이는 남순(南巡)에서 행한 언급(講話), '남순강화(南巡講話)'로 남게 된다.
남순 이후 베이징의 인민일보가 지지 논평을 싣고 당과 군부에서도 경제특구를 비롯한 개혁개방 정책에 대한 견지를 천명한다. 국내외 상황 및 당 내부 권력 관계로 지지부진하던 개혁개방이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1993년 14차 당대회와 이어 개최된 전인대는 8-9% 경제 성장과 외자 유치 계획을 인가했으며, 이후 약 10년간 세계 최대 인구대국인 중국이 10%대의 고도 성장을 이룩하는 발판이 된다.
중국 전문가 에즈라 보겔(Ezra F. Vogel) 교수는 자신의 저서(Deng Xiaoping and the transformation of China)에서 덩샤오핑을 다른 중국 지도자와 달리 마지막까지 정책적 의지를 관철하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위인으로 평가하였다. 다른 중국학 석학 오빌 쉘(Orville Schell) 교수는 남순의 목적지로 선전을 비롯한 광둥을 택한 이유와 관련, 저서(Mandate of Heaven)에서 '개혁개방의 선도 지역인 남부 특구를 방문해 개혁주의자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강경 보수파에게는 본인이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을 보여주며, 외국에는 중국 경제가 흔들리지 않고 더욱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선전은 바오안현(寶安縣)에서 1979년 시로 승격되고 이어 1980년 경제특구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선전은 1,780만 명의 인구에, 전체 GDP는 이미 몇 년 전 홍콩을 넘어섰고, 1인당 GDP는 3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과거 홍콩에 인접한 작고 가난한 어촌 마을이 개혁개방의 선도 역할을 하면서 가장 큰 수혜자로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이다. 이제는 중국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민의 도시, 유행의 도시, 부유의 도시이다. 1선 도시인 베이상광션(北上廣深: 베이징-상하이-광저우-선전)을 말할 때 베이상션광(北上深廣)이라며 선전을 광저우보다 앞에 언급하기도 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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