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를 구출하라 [세상읽기]

한겨레 2024. 8. 2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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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산학교 학생들이 지난 6월14일 서울시의회 앞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앞머리 3㎝ 이하, 일명 ‘스포츠형’ 무방.” 1978년 2월 말. 입학 예정 중학교에서 나눠준 안내문의 저 문구.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무방’이라는 단어가 ‘괜찮다’는 뜻이라고 아버지가 내게 일러주셨다. 목 앞에 ‘훅’(hook)을 채워야 하는 까만 교복을 입고 교문을 들어섰다. 엄한 규율 권력과 언어 및 신체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임을 이내 발견했다.

창피스러운 고백이지만 ‘학생인권조례’ 전문을 한달 전쯤에야 읽어보았다. 서울시의회가 제기한 ‘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 조례안’에 대한 효력을 대법원이 정지시켰다는 보도기사를 접하고 난 직후였다. 조례를 읽어내리던 나는 오래전 우리나라 헌법 조문을 꼼꼼히 살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묘한 흥분’이 일었다.

‘제5조(차별받지 않을 권리) ①학생은 성별, 종교,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민족, 언어, 장애, 용모 등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또는 가족상황, 인종, 경제적 지위,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병력, 징계, 성적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다양한 처지에 놓인 청소년들을 현장에서 만나왔다. 가정이나 사회, 예전 학교에서 사소한 결점만으로도 놀림을 받았거나 무시당했던 경험이 있던 아이들. 새로 입학한 우리 학교가 자신들에게 우호적이고 안전한 곳인지 확인할 때까지 긴장감을 내려놓지 못한다. 학교와 기숙사에서 함께 살아가다 보면 ‘작은 차이’보다는 인간으로서 ‘커다란 공통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서로 알아차린다. 조례문 5조는 보편적 조문을 건조하게 진술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읽는 내 마음에서는 단어 하나하나에 걸려서 연상되는 인물과 사례가 떠오른다.

일부 보수단체들은 ‘임신 또는 출산’, ‘성별 정체성’ 부분을 집요하게 걸고넘어지면서 조례 폐지를 요구해왔다. 또다른 우려는 학생인권조례가 교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목소리로 드러났다. 이런 문제 제기는 그 전제가 옳지 않거나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위의 5조는 학생들이 지닌 이런저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게다가 위반 사항에 대한 시정 조치를 권고할 뿐이지 조례만으로는 위반자를 처벌하지 못한다.

한양대학교 김현수 교수 연구팀(2016)의 ‘학교생활에서 학생의 인권보장 실태조사’를 보면 조사 항목부터 놀랍다. 학교에서 제한당한 경험의 종류에 두발 길이나 모양, 면티·양말 색깔, 치마·바지 길이, 화장·미용 제품, 동의 없는 소지품 검사, 직간접 체벌 경험 등이 담겨 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던 46년 전 풍경에 견주어 볼 때, 학생 생활 규제에 관한 한, 왜 이렇게 달라진 것이 거의 없는가.

내가 우리 학교에서 관찰한 아이들은 머리카락이 길었다 짧았다 노랗다 빨갛다 반복하고, 화장은 불균형하게 짙어지다가 2~3년 이내에 조화롭고 덜 험악한 상태로 균형점을 찾아간다. 그냥 놓아두면 스스로 철이 들어서, 선배들 모습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해볼 것들 다 해보니 ‘결론은 귀찮아서’ 평범한 상태로 귀결된다. 김 교수팀은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의 재학생들을 상대로 위에서 열거한 항목별로 응답률을 비교했다. 조례 제정 지역 내 학생들이 9~26% 비율로 더 높게 각 항목에서 인권을 보호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 오늘 얼굴이 좀 부어 보이네?’ ‘어, 샘, 상대방 얼평(얼굴 평가), 몸평(몸매 평가) 금지!’ ‘아니야, 이건 네 건강 상태 걱정이라고.’ ‘그래도 오해의 소지 있으니 조심하셔요. 흐흐.’ 약간은 농담 섞인 교사-학생 사이 대화라도 얼마간 긴장감은 느껴진다. 얼핏 인권은 개인 대 개인의 문제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가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적 관행과 제도 속에 인권을 침해하는 요소들이 깊숙이 잠재해 있다. 경험 많은 대안학교 교사라 해도 경계해야 할 습속이 의식과 무의식 속에 배어 있다. 학생들과 함께 살아가고 대화 나누면서 바로잡아가야 한다. 학생 인권이 결코 교권 확립과 대립하는 사안이 아니라는 얘기다. 현재 6개 시·도에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어 있으나 보수적 정치 지형 아래 각 시·도의회가 여전히 그것의 폐지를 획책하고 있다. 부당하다. 상식과 증거에 기반을 둔 논의가 되도록 방향 전환을 촉구한다.

※참조자료: 공현 & 진냥(2024), 학교를 바꾼 인권 선언, 교육공동체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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