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등장하자, 관망하던 청년·유색인종 비로소 움직였다”
전 세계는 11월5일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다. 이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사회가 사실상 ‘신냉전’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러진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결정된 카멀라 해리스(59) 부통령과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78) 전 대통령은 정반대의 외교 정책을 내세우고 있어, 결과에 따라 국제 질서는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 국내적으로는 첫 흑인 여성 후보와 백인 남성 후보의 대결이란 ‘구도’에서 볼 수 있듯 미국이 과연 누구의 나라인가를 놓고 '정체성'을 둘러싼 내전에 버금가는 첨예한 대립이 이뤄지는 중이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지난 6월 말부터 미국에선 여러 굵직한 사건들이 잇따르며 선거 구도가 크게 요동치고 있다. 과연 미국 대선 판세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하상응 서강대 교수(미국 정치)는 16일 서울 공덕동 본사에서 한겨레와 만나 “지금 같은 추세가 이어지면 해리스에게 유리하다. 민주당에 더 올라갈 여지가 많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미국 정치를 연구해 박사 학위(2007)를 받았고, 예일대에서 박사후 연구원 생활을 한 뒤, 2015년부터 서강대에서 미국 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미국정치연구회 회장을 역임했고,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트럼프의 등장과 반동의 정치’ 등 한국과 미국의 정치심리, 여론, 투표 행태에 대해 논문을 써왔다. 하 교수를 통해 미국 대선의 현재 상황을 보다 깊게 들여다봤다. 하 교수는 경실련 정치개혁위원장도 맡고 있다.
―지난 6월 말부터 미 대선판이 크게 출렁였다. 급박한 사건 전개에 숨이 가쁠 정도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1942년생인데 그가 재선 도전을 할 때부터 과연 4년을 더 버틸 수 있겠냐는 우려가 있었다. 이런 가운데 6월27일 첫 텔레비전 토론회가 열렸다. 여기서 바이든 대통령이 노쇠함을 드러내는 큰 사고가 났다. 토론회 전까진 두 후보가 ‘박빙’이었다. 하지만, 이후 트럼프 지지율은 변하지 않았는데 바이든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3주를 버티다 7월21일 물러났다.
“미국 대선 승부를 가르는 이른바 ‘경합주’는 6~7개다. 미시간·위스콘신·펜실베이니아 등 ‘러스트 벨트’ 3개주와 애리조나·조지아·네바다를 더해 6개주, 여기에 노스캐롤라이나까지 7개주를 꼽기도 한다, 객관적 선거 구도상 바이든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곳은 ‘러스트 벨트’다. 여기에서 이기고 나머지 주의 결과가 2020년과 같다면, 선거인단 기준으로 270 대 268로 바이든이 이긴다. 그런데 승부의 열쇠를 쥔 러스트 벨트에서 ’오차 범위’ 이내이지만 바이든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바이든 선거운동본부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봤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7월13일 트럼프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모든 사진기자들이 평생 한번 찍어보고 싶어 하는 사진(에번 부치 에이피(AP) 기자가 성조기 아래서 주먹을 불끈 치켜든 트럼프의 모습을 담았다)이 나왔다. 그런데도 트럼프 지지율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을 이길 때나, 2020년 바이든에게 질 때 모두 트럼프의 전국 득표율은 46%대(2016년 46.1%, 2020년 46.8%)였다. 지금도 전국 단위 여론조사 지지율은 46~47% 정도이다. 트럼프를 찍을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샤이 트럼프’는 없는 것이다. 확장성이 없다는 점이 트럼프의 가장 큰 문제다.”
―민주당은 해리스 쪽으로 급격히 뭉쳤다.
“바이든이 해리스를 지지했지만, 구속력 있는 결정은 아니었다. 민주당 내에서 불만·반감이 있었다면 해리스를 포함한 다른 후보들을 대상으로 별도 경선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대동단결했다. ‘이번 선거는 절대로 질 수 없다’라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여론조사에 변화가 생겨난다.”
―어떤 변화인가.
“16일 현재 전국 단위 지지율과 러스트 벨트 모두 해리스가 앞서고 있다. 원인은 유색인종과 젊은층 유권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바이든 때는 미온적 반응을 보였던 이 그룹이 ‘해리스 지지’ 쪽으로 움직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바이든 때는 왜 망설였나.
“설명이 필요하다. 사실 바이든이 한 일이 참 많다. 30년쯤 지나서 미국 정책 교과서를 쓰면, 바이든은 ‘21세기에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힐 거라 생각한다. 바이든이 임기 첫 2년 동안 미 연방의회를 통과시킨 굵직한 법이 ‘칩과 과학법’(반도체 육성법), ‘인플레이선 감축법’(전기차 지원 및 세제개혁) ‘인프라법’ 등 6개나 된다. 다만, 교육·보건·보육 정책 관련 공약들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이 뼈아프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이 대학을 다니며 빌린 등록금의 총액이 거의 1조7660억달러(2023년 8월 현재·약 2392조원)에 이른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를 일부 탕감해주기로 약속한 바 있다. 또 약값을 낮추거나 연방정부 차원에서 육아휴직을 보장하는 안도 있었다. 앞서 법으로 만든 반도체·환경·인프라도 중요하지만, 저소득층에게 정말 중요한 건 교육·보건·보육이다. 유색인종과 젊은층이 중시하는 이 공약들이 상대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았다. 바이든의 노력이 부족했던 건 아니다. 2022년 8월 등록금 일부 탕감을 행정명령으로 발표했지만, 연방대법원이 지난해 “대통령 권한 남용”이라고 가로막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과 정체성이 가까운 해리스가 떠오르니 ‘나이든 백인’ 바이든보다 조금 더 기대감을 품을 수 있게 됐다. 이런 심리가 여론조사에 반영된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러스트 벨트의 움직임은.
“바이든 대통령의 친노조 좌파 성향을 주목해야 한다. 그동안 여러 지역 연설에서 ‘고장 난 레코드’처럼 항상 반복해서 ‘노조 만세’를 얘기했다. 그다음에 ‘월가에서 말하는 ‘트리클 다운’(낙수효과) 믿지 말라’는 것이다. 러스트 벨트는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는데,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빼앗겼다. 이유를 분석해 보니, 거기 살던 고등학교를 나온 백인 중산층 노동자들이 트럼프 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 사람들의 정서를 잘 이해하는 바이든이 노조를 중시하면서 이들을 잘 다독여 일부를 다시 민주당 쪽으로 데리고 왔다. 백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조 중시’가 바이든이 추진한 정책의 핵심 포인트였고, 해리스가 이를 물려받고 있다.”
―해리스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팀 월즈(60) 미네소타 주지사도 눈길을 끈다.
“해리스 입장에선 러스트 벨트를 무조건 이겨야 한다. 민주당 소속이며 인기 있는 그레천 휘트머(52) 미시간 주지사나 조시 셔피로(51)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등이 주목받았다. 이들을 선택해 3개주 가운데 하나를 안정적으로 가져오겠다는 구상이다. 결과적으로 월즈라는 완전히 서민적인 인물을 선택했다. 이분의 학력과 경력을 보면, 전혀 엘리트가 아니다. 월즈가 반드시 이겨야 하는 러스트 벨트의 ‘중산층 백인’들을 끌어오기에 가장 적당하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그가 쓴 ‘이상해’(weird)라는 말이 민주당 지지자들의 ‘밈’이 됐다.
“월즈가 7월23일 미네소타 주지사 자격으로 엠에스엔비시(MSNBC) 방송과 한 아침 인터뷰에서 트럼프와 부통령 후보인 제이디(J. D.) 밴스를 겨냥해 “이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다”(These guys are just weird)라고 말했다. 사실 그동안 민주당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을 공격하는 말은 ‘민주주의에 대한 실존적 위협’이었다. 그런데 월즈의 표현이 널리 퍼지면서 트럼프에 대한 공격이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에서 ‘이상해’가 됐다. 민주당 메시지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변한 것이다.”
―현재 미국의 정치 대립이 극심하다. 그 배경에 정체성 정치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정체성 정치엔 젠더·성지향성·인종·이민 등 크게 네개 범주가 있다. 미국의 주류는 백인 남성이었는데, 1965년 법 개정으로 ‘이민 개방’을 하며 인종 다양성이 늘어나고 최근 여성·성소수자의 권익이 향상됐다. 현재 정체성 정치는 그런 소수자의 정치·사회적인 권익이 보장됨에 따라 발생하는 일종의 ‘백래시적 상황’을 뜻한다. 백인들이 처음엔 소수자 권리 보호에 긍정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역차별을 받게 됐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주류가 바뀔 수 있다는 두려움에 객관적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 같은 이민 정책이 유지되면, 2045년께 백인 비율이 50% 이하(미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2020년 현재 백인 비율은 57.8%)로 떨어진다고 한다. 지금까지 미국의 주류는 시골에 살면서 교회 열심히 다니는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백인이었지만,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정치적으로 잘 활용한 게 2016년 대선 때의 트럼프였다. 트럼프는 백인 주류가 핍박받고 있다고 주장해 선거에서 이겼다. 트럼프의 구호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과거의 주류였던 백인 중산층에겐 ‘옛날 같은 세상으로 돌려주겠다’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정체성 정치는 이번 선거에서 누구에게 유리한가.
“트럼프나 밴스는 지금 입이 간지럽다. 해리스가 여성이고 흑인인 점을 공격하고 싶어한다. 공화당에선 이를 만류한다. 2016년엔 통했을지 모르지만 2024년에 정체성 정치를 부추기면 민주당이 해리스를 중심으로 더 결집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공화당 일각에선 바이든을 상대로 만들었던 전략인 경제, 특히 인플레이션과 불법 이민자 문제를 주요 공격 포인트로 삼는 것이 낫다고 본다.”
―트럼프가 지면 내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공화당 지지자 과반수는 2020년 선거가 여전히 부정선거라고 믿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3월 이번 선거에서 내가 진다면 ‘피바다(blood bath)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해리스가 이겨도 차이가 크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부정선거 얘기가 나올 것이고, 전면적인 내전은 아니지만 2021년 1월6일 같은 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지역적 소요 사태가 날 가능성도 있다. 요즘 중동·아프리카에서 내전 전공을 했던 학자들이 새롭게 공부하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11월까지 남은 변수는.
“9월10일 첫 토론회다. 해리스가 인터뷰나 토론을 잘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래서 토론회가 하나의 변수가 될 텐데, 분명한 건 6월 말 바이든만큼 못하지는 않을 거다. 또 하나는 12일 주식 폭락과 같은 경제 충격을 생각할 수 있다. 대학이 개강하면 5월 같은 친팔레스타인 캠퍼스 시위가 부활할 가능성도 있다.”
―대외 정책은.
“미국 대선에서 대외 정책이 이슈가 되는 경우는 베트남·이라크 전쟁처럼 미국군이 파견돼 전쟁을 할 때뿐이다. 경제안보 쪽에선 민주당과 트럼프 모두 ‘미국 우선주의’(아메리카 퍼스트) 원칙이 분명하다. 다만, 전통적인 군사안보 쪽에선 민주당이 이기면 동맹을 중시하는 현재 기조가 유지되고, 트럼프가 되면 현재 정책이 싹 바뀔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와 밴스는 ‘우크라이나 지원’에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트럼프는 당선되면 국방부·국무부·정보라인을 싹 바꿀 것이다. 1기 때는 대통령을 안 해봐서 속았는데, 이제 보니 외교·안보라인이 진짜 ‘딥스테이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가령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훼방놨던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같은 사람들을 싹 갈아버리겠다라는 거다. 그렇게 되면 요새 계속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을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친구’ 김정은이 핵 만들었는데 인정하자고 나올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세계사적으로 이번 대선이 갖는 의미는 뭘까.
“1988년 이후 미국 대선이 9번 있었는데 공화당이 전국 단위 득표율에서 앞선 것은 2번밖에 없다. 그나마 선거인단 제도를 통해 민주당이 5번, 공화당이 4번 이겼다. 이런 현실에 더해 앞으로 미국의 인구구조 변화를 생각할 때 공화당이 살아남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소수자를 일부 포용하는 쪽으로 변해야 한다. 트럼프는 이미 3번 나왔다. 이번에 지면, 트럼프 방식이 아니라 공화당이 전국 단위 득표율에서 민주당을 앞서는 정당으로 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트럼프화된 공화당'에서 그럴 수 있을까. 이게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민주당의 관전 포인트는 해리스가 이기면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아시아계 대통령이 된다. 바이든 행정부가 약속했던 교육·보육·보건 관련 공약들을 얼마나 지키는지 봐야 한다. 그와 함께 한국보다 훨씬 더 심각한 미국의 ‘정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될지 완화될지 관찰해야 한다.
트럼프의 미국과 해리스의 미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다. 미국이 내전에 준하는 상황으로 가게 될지, 이를 바꿀 계기를 만들지가 미국 국내 정치 관점에선 가장 중요하다. 대외 정책은 미국 내부가 이렇게 복잡하니, 밖에 신경 쓸 이유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그 때문에 미국 패권의 쇠퇴나 다극화와 같은 말들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대외 정책은 미국 국내 정치가 얼마나 안정되느냐의 종속 변수가 아닐까 한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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