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으로 애인으로, 대중문화 속 사교육 강사의 변모

이상원 기자 2024. 8. 22.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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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 업계를 그린 대중문화 작품이 늘고 있다. 사교육의 효과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강사들의 유능함을 조명한다. 이들은 〈SKY 캐슬〉 부류의 비판적 사회극과는 궤를 달리한다.
학습 솔루션 예능 <성적을 부탁해:티처스>(채널A) 출연진. ⓒ채널A 제공

사교육에는 망국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울며 겨자 먹기로 지출하는 사교육비에 나라가 휘청일 정도라는 뜻이다. 지난해 여당 관계자들은 ‘일타강사’들의 고소득을 사회악이라고 비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사교육 카르텔”을 교육 문제의 온상으로 지목한 직후였다. 하지만 최근 대중문화에 비친 사교육의 이미지는 이들 관점과는 딴판이다. 사교육으로 성적을 올리는 ‘감동 실화’가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다. 일타강사는 창작물 주인공의 단골 직업이다. 이들은 학생의 멘토이자 롤모델, 나아가 로맨스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6월30일 시즌2 방송을 시작한 〈성적을 부탁해: 티처스〉(이하 〈티처스〉, 채널A)는 입시를 다룬 예능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 강사가 도전 학생별로 맞춤 코칭을 해주며 인생의 최고점을 선물해드린다”라고 소개한다. 유명 사교육 강사 정승제씨, 조정식씨가 출연한다. 강사는 성적이 낮은 수험생 출연자에게 학습 ‘솔루션’을 제시한다. 과외에 가까운 밀착 수업을 해 성적 향상을 돕고, 태도가 나쁜 학생에게 불호령을 내리기도 한다. 사제의 도전은 감성을 자극한다. 몇 달 뒤 기적처럼 학생의 점수가 오르면 강사는 눈물을 보인다. 말끔한 건물에서 명문대 출신 조교들이 함께하는 수업을 보며 패널들은 “부럽다. 우리 애도 저기 보내고 싶다”라고 탄식한다.

드라마 <일타 스캔들>(tvN)에서 수학 일타 강사 ‘최치열’은 냉정하고 성취 지향적이지만 따뜻한 면모도 지닌 인물이다. ⓒtvN 제공

사교육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입시 경쟁을 비판적으로 다룬 〈SKY 캐슬〉(JTBC) 부류 사회극과는 성격이 다른 작품이 대다수다. 지난해 방영한 드라마 〈일타 스캔들〉(tvN)은 사교육 강사 최치열(정경호 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온라인상에서는 등장인물의 연기를 두고 “수학 일타강사로 유명한 아무개의 화법을 본뜬 것 같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는 냉정하고 성취 지향적이지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무료 수업을 해주는 따뜻한 면모도 지닌 인물이다. 지난 6월30일 종영한 드라마 〈졸업〉(티빙) 역시 사교육 종사자들이 주인공이다. 강사들이 사적 이익과 교육의 보람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나온다. 학원강사 주인공이 학교에 찾아가 내신 시험문제에 오류가 있다며 교사에게 항의하는 장면도 있다. 사교육 강사를 무시하는 교사에게 주인공은 “애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학생부를 앞세워 교권을 참칭한다”라고 일갈한다. 지난 6월19일 개봉한 영화 〈대치동 스캔들〉, 기획 중인 드라마 〈대치동 1들의 전쟁〉(ENA) 등 ‘사교육의 관점’을 담은 작품들은 그 외에도 다수 나오고 있다.

“연예인 자리를 넘겨받았다”

전례를 돌아보면 의아한 일이다. 2010년 드라마 〈공부의 신〉(KBS2)은 조기 종영 서명운동이 벌어지는 등 곤욕을 치렀다. 학교 교사를 무능하게 묘사하고 외부 입시 전문가를 주인공으로 삼아 KBS 노동조합에서도 “교육 현실을 왜곡한다”라며 항의했다. 2019년 방영한 예능 〈공부가 머니?〉(MBC)는 〈티처스〉와 비슷한 ‘교육 솔루션’ 프로그램이었다. “교육비 절감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역시 사교육을 더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고 논란 속에 종영했다. 〈SKY 캐슬〉(JTBC, 2019) 〈강남엄마 따라잡기〉(SBS, 2007)처럼 사교육을 병폐로, 강사를 악인으로 그린 작품들이야말로 과거 교육 소재 드라마의 주류이자 전형이었다.

4월18일 서울 대치동 일대,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원들 사이로 한 학생이 지나가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사교육의 얼굴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유명 강사들의 공이 크다. 많게는 수백억 원에 달한다고 알려진 강사들의 연 소득은 그 자체로 업의 지위를 올렸다. 이들은 활발한 정보 공유와 인터넷 강의, 개인 SNS를 통한 소통 덕에 전국적 명성을 떨친다. 강사의 옷차림부터 부동산 투자까지 뉴스가 되고 있다. 이전과 달라진 일타강사들의 면면도 살펴볼 만하다. ‘학자’ 같은 모습의 고연령 강사들은 수능 사교육 시장에서 점차 밀려나는 추세다. 고학력과 강의 능력 외에 ‘스타성’을 갖춘 인물들이 그 자리를 꿰찼다. 30~40대, 젊으면 20대인 이들은, 명품 옷을 입고 머리와 피부를 연예인처럼 가꾼다. 강사들의 인생에 대한 직설적 조언이나, 욕설을 섞은 농담들이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다. 온라인 수험생 커뮤니티에는 강사를 아이돌처럼 추종하는 이들도 있다. 사교육 강사 집단은 ‘망국병을 조장하는 악덕 업자’보다 연애 드라마 주인공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했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사교육 강사가 “시대가 주목하는 직업”으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창작물 속 의사나 변호사, 연예인의 자리를 최근 사교육 강사가 넘겨받았다. 평범한 고소득자를 넘어 ‘저렇게 되고 싶다’는 욕망이 캐릭터에 투영되어 있다.” 그는 대중매체가 사교육 강사를 조명하게 된 데에 맥락이 있다고 말했다. “몇 년 전 공교육의 문제를 매우 다차원적으로 분석한 다큐멘터리가 여러 편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교육의 이런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프로그램의 분석이 결과적으로 개인의 삶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더 현실적인 프로그램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다.”

교육 당국 불신이 사교육 유대감 키운다

학습 솔루션 예능이나 사교육 배경 창작물은 공교육 재건이라는 사회적 난제 해결에 매달리는 대신 입시라는 ‘긴급 상황’이 닥친 이들에게 호소한다. 그 결과 사교육의 부조리를 따지기보다는 효용에 주목했다. 지난 1월29일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김승훈 〈티처스〉 CP는 사교육 강사가 ‘교육 전문가’로 비춰도 되느냐는 의문에 이렇게 답했다. “충격적이었던 게 ‘학교 선생님은 무능력하고 나에게 도움 주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아이들이 말했다. 학원에 가지 않더라도 공교육에서도 1등이 나올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드라마 <졸업>(tvN)의 한 장면. 사교육 강사들의 교육적 갈등과 로맨스를 그렸다.ⓒtvN 제공

과거 사교육업계에서 ‘실전 모의고사’ 문제집을 제작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활동가이자 교육평론가 문호진씨는 “학생들이 수험생 커뮤니티와 사교육에 모종의 유대감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최근 펴낸 책 〈수능 해킹〉에서 그는 “상업적으로 오염된 방향일지라도, 사교육은 지금 당장 필요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학생들을 걱정하며 함께한다는 느낌을 가져다준다”라고 적었다. 고도화된 사교육에 매력을 느낀 수험생 일부는 명문대에 진학한 뒤 학원 조교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도 한다. 또래 집단에서 인정받고 성취감을 얻기 위해서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사교육 강사가 되는 명문대 졸업생의 이야기(드라마 〈졸업〉)는 ‘현실 고증’인 셈이다.

문호진 평론가는 지난해 여름 ‘킬러 문항’ 논란과 같은 국면에서, 학생들의 사교육에 대한 유대감은 더욱 강화됐다고 말했다. 현행 수능에 문제가 있는 것과 별개로 교육 당국이 킬러 문항의 기준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그 원인으로 카르텔을 지목하면서 신뢰를 잃고 수험생의 불안감만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유명 강사들이 “애들만 불쌍하다” “섣부른 개입은 문제의 해결책이 못 된다” 등의 메시지를 내면서 오히려 사교육이 학생들을 변호하는 듯한 모양새가 됐다. 이후 사교육 업체들이 세무조사를 받고 강사들의 소득이 정치인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수험생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정부의 ‘탄압’에 맞서 사교육과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대중문화가 내보이는 사교육의 새로운 이미지는 낯설다. 어디까지가 이 ‘교육자’들의 진심이고 어디부터 상술의 산물인지 가늠할 수 없다. 다만 공감하기 쉽고 입체적인 인물로 변해가는 사교육 강사들의 이미지 자체가, 교육 현실의 새로운 적신호일지도 모른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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