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봉처럼 불 끄고 연습한 데이식스, 일 냈다... 초등생도 부르는 '청춘 찬가'
어떻게 1030세대를 사로잡았나]
지난 8일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올림픽 태권도 남자 58㎏급 결승전. 2층에서 대기하다 계단을 따라 1층 경기장으로 내려오던 박태준(20) 선수의 한쪽 귀엔 흰색 무선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그가 듣던 노래는 밴드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박태준은 올림픽 남자 58㎏급에서 한국 태권도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가 경기 직전 듣던 노래 제목처럼 태권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쓴 것이다. 그는 "가사가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느낌이었다"며 "오늘 '(역사의) 한 페이지를 한번 만들고 싶다'는 바람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경기장에) 입장했다"고 말했다.
K팝 최신 댄스곡 밀어낸 5년 전 노래
파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마음만 사로잡은 게 아니다.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가 요즘 새삼 인기다. 멜론, 스포티파이 등 9개 음원 플랫폼의 곡 사용량을 집계하는 써클차트 최신 주간 인기곡(스트리밍·4~10일 기준) 7위에 올랐다. 2019년 7월 이 노래가 발표된 이후 최고 순위다. 5년이나 된 이 노래는 K팝 아이돌그룹 최신 댄스곡들을 줄줄이 제치고 차트에서 역주행하고 있다.
이변의 징조는 2년여 전부터 나타났다. 2022년 10월 병역을 이행하던 멤버 도운과 영케이, 원필이 군복을 입고 공연한 KBS2 '불후의 명곡' 영상이 입소문을 타면서 순위가 조금씩 올랐다. 김진우 써클차트 수석연구위원은 "곡 발표 1, 2주 안에 빨리빨리 이뤄지는 K팝 소비 흐름을 고려하면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의 2년에 걸친 장기 차트 역주행은 흔치 않은 사례"라며 "2023년 이후엔 매해 1월 첫째 주에 갑자기 소비가 증가하는 흐름도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가 새해맞이 노래로도 인기라는 뜻이다.
고3 제자 위해 선생님이 불러주고, 결혼식 행진곡으로도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가 인기곡 차트에 꾸준히 머무르는 건 10대~30대에게 이 노래가 '청춘 찬가'로 통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청춘의 한 장 함께 써내려 가자"는 희망찬 가사에 청량한 밴드 연주가 더해져 청춘의 반짝이는 순간을 음악으로 돋을새김해서다.
고3 제자를 둔 교사들에게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는 '수능 응원 애창곡'이다. "입시 스트레스로 불안이 최고조에 달했던 고3 때 학교 축제에서 좋아했던 선생님이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를 불러 주셨다. '솔직히 나보다도 네가 몇 배는 더 힘들었을 거라고 믿어'란 가사에서 힘을 얻은 뒤 내 인생 '18번 곡'이 됐다"(김성현·22)는 게 요즘 대학생들이 들려준 추억이다. 취업 준비생들은 "'오늘을 위해 그저 견뎌줘서 고마워'라는 가사에서 위로"(강진주·24)를 받고, "'지금이 오기까지 마냥 순탄하진 않았지'란 노랫말이 여태 내가 한 고생을 다 알고 다독여주는 것 같아"(이서현·23) 이 곡을 챙겨 듣는다.
결혼식장에서도 인기다. "솔직히 말할 게. 많이 기다려 왔어. 너도 그랬을 거라 믿어. 오늘이 오길 매일같이 달력을 보면서." 방송인 정호철은 지난 3월 결혼식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이혜지와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를 함께 불렀다. 정호철처럼 유튜브엔 젊은 부부들이 이 노래를 결혼식 행진곡으로 쓴 뒤 함께 식장을 걸어 나가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줄줄이 올라와 있다. 결혼식 사회 전문 진행자인 명희준씨는 "역경을 딛고 함께 해보자는 메시지가 담긴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와 '끝없는 가능성 중에 날 골라줘서 고마워'란 노랫말로 시작하는 데이식스의 '웰컴 투 더 쇼'가 요즘 20대와 30대 신혼부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결혼식 행진곡"이라고 말했다.
"현실 사는 가사... '쇠맛' 없어 좋아요"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의 인기는 이른바 '쇠맛'으로 범벅이 된 K팝 댄스 아이돌 그룹 노래들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뜻을 알 수 없는 외계어와 감탄사를 남발하고 육중한 전자 음악으로 진행되는 노래에 대한 피로감이 커진 터였다.
"'쇠맛' 대신 밴드 특유의 자연스럽고 시원시원한 음악이 쉬 질리지 않고"(채성아·22), "가사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가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크게 와닿으면서도 '떼창' 하기 좋은 여름 축제곡 같아서"(신예린·22) 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게 데이식스 팬들의 말이다. 부모들도 데이식스를 좋아하는 자식들 덕에 팬이 됐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를 둔 학부모 김모씨는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반 친구들이 선생님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를 자꾸 틀어달라고 해서 우리 아이도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됐다"며 "아들 덕에 여름휴가 때 차 안에서 이 노래 가사를 외울 정도로 들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댄스 아이돌 그룹 준비했던 연습생의 반란
데이식스는 밴드로는 이례적으로 두터운 팬덤을 지니고 있다. 지난 4일 인천 송도달빛축제공원에서 열린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엔 데이식스를 무대 앞에서 가까이 보려고 일부 관객들이 '밤샘 대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데이식스의 성장사는 팬들과의 유대감을 높였다. 데이식스는 2015년 데뷔 당시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이하 JYP)의 '미운 오리 새끼'였다. K팝 아이돌 간판 기획사에서 소속 가수들이 모두 춤추면서 노래할 때 데이식스는 유일하게 악기를 잡았다. 연습생 시절부터 뛰어난 노래 실력을 뽐낸 멤버 성진은 애초 K팝 댄스 아이돌그룹 데뷔를 준비했다. 춤을 못 추자 3년 동안 그를 지켜본 JYP가 전략을 수정해 원필과 영케이, 도운을 모아 밴드로 꾸렸다. JYP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일주일에 100시간 넘게 악기 연주를 연습했다. 손가락 물집은 기본. 노래를 부르며 악기 연주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합주실 불을 모두 끄기도 했다. 어두운 방에서 붓글씨를 연습했다는 조선시대 '한석봉'이 따로 없었다. 2012년부터 한 달에 두 곡씩 자작곡도 썼다. 데이식스가 직접 쓴 곡으로 연주하는 게 아니면 데뷔시킬 수 없다는 결정을 JYP가 내렸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데뷔해 공연 중심으로 활동하던 데이식스가 뒤늦게 대중적 인기를 얻은 과정이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오랜 무명 기간을 거친 멤버들의 성장사가 그들이 쓴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의 진정성을 더하면서 파급력이 커진 것"이라고 봤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서진 인턴 기자 lsdjm9072@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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