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장비발 대신 아버지발
장비 욕심이 매우 적다. 자연히 자동차에 대한 욕심도 그다지 없어 오래도록 운전면허 없이 지냈다. 그렇다고 면허 따기를 무작정 미룰 수는 없었다. 가령, 전쟁이 나거나 좀비가 창궐하면 가장 먼저 필요한 기술이 기동력 아닐까. 혹은 누군가와 차를 타고 달리다가 갑자기 운전자가 아프기라도 하면 내가 대신 핸들을 돌릴 정도는 되어야 그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이유로 최근 기능 시험 4수 끝에 면허를 땄다. 갑자기 자동차가 갖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면허증을 장롱에 넣고 싶지도 않았기에 도로 주행 연수를 받기로 했다. 장소는 고향 읍내였고, 운전 마스터는 아버지였다. 나는 기술을 연마하고, 아버지는 노년에도 자식을 가르치며 자기 효능감을 극대화한다. 좋군 좋아. 나쁨이 끼어들 여지는 보이지 않는군.
그럴 리가 없었다. 70대에도 다혈질에 독설가 자질을 잃지 않는 아버지는 잔뜩 겁먹은 내가 좌우 방향을 헷갈릴 때, 과감히 차선을 바꾸지 못할 때, 후진하다 두부 공장 컨테이너를 (살짝) 들이받았을 때 대역죄인 대하듯 성을 냈다. 당장 내리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던가. 물론, 나는 전방 주시 태만을 저지르지 않아야 하므로 꿋꿋하게 운전석을 지켰다.
그렇게 십수 회 연수를 받은 어느 날, 내 둔한 운동신경도 이윽고 반복 학습에 굴복당하고, 비교적 노련하게 주행하게 되었다. 자동차 안엔 고요가 찾아왔다. 창밖 시골 도로변엔 배롱나무꽃이 만개했고, 논의 푸른 벼는 무더운 여름 바람에 몸을 이리저리 가눴다.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코끝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고였다.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찾아와, 아버지와 운전 연습을 하던 날들을 얼마나 그리워할지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장비 욕심은 없지만, 갖추게 된 것을 무용하게 방치하지 않으려는 욕심 정도는 있었고, 그 덕분에 오랜 세월 다양한 감정을 주고받으며 가정사를 함께 일궈온 아버지와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말하자면, 내게 운전면허가 필요한 것은 전쟁, 좀비 창궐 등 상상 속 비상사태가 아니라 곧 운전면허증을 비롯해 많은 것을 세월 뒤편에 반납해야 하는 나이 드신 부모를 모셔야 할 때가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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