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재벌은 힘 빠지는데 벤처는 왜 못 크나

이인열 기자 2024. 8. 2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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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 안목 등 재벌의 장점
벤처 세대, 아직 못 뛰어넘어
기여보다 보상만 집착해도 안 돼
도전과 창의가 넘치는 본질로

재벌 개혁 운동의 유효 기간이 멀지 않았다” 10여 년쯤 전 대표적인 재벌개혁가로부터 들은 얘기다. 핵심은 고속 성장을 지속 못 하는 재벌은 자연스레 대물림 과정에서 쪼그라들고 지분율이 약해지는데, 3, 4세에 이르면 대주주 지위를 유지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란 얘기였다. 앞선 미국에서 입증 사례가 많다고도 했다. 실제 우리 사회의 재벌이 급속히 작아지고 있다. 30대 재벌이란 말이 사라진 지 한참 지났다. 10대 재벌만 놓고 봐도 상당수가 다음 세습을 포기했거나 포기할 것으로 보인다. 당초 재벌의 빈 공간을 벤처 기업들이 성장해 메워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벤처의 선두주자 네이버와 카카오 등은 물론 최근 불거진 티메프(티몬+위메프) 사태 등을 지켜보면 많이 불안한 게 현실이다. 왜 재벌은 작아지는데 벤처는 크지 못하고 있을까.

얼마 전 벤처 1세대 기업인을 만나 오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대화 중에 많은 걱정이 한국 경제와 미래였다.

“나도 재벌에 우호적이지는 않지만 요즘 보면 재벌 창업 세대들은 참 대단했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벤처는 기대한 것만큼 못 나아가는 데 아쉬움이 크다.”

그에게서 나온 다소 의외의 말로 대화는 시작됐다. 벤처의 부진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너무 쉽게 재벌 따라하기에 빠진 벤처인들도 있고, 천문학적인 재산을 단기간에 벌어들인 행운에 취해 새로운 도전을 접은 경우도 있다. 일부는 기술력이란 본질을 외면한 채 머니 게임에 몰두한 측면도 있고, 일정 규모로 커진 조직을 경영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몰라 무너지기도 했다. 벤처 문화의 실종도 지적된다. 도전과 창의라는 벤처 본연의 문화가 뿌리 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회사 간판만 떼고 보면 삼성, 현대차 직원과 네이버, 카카오 직원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기존 재벌 체제의 문제가 대주주 중심 문화 속에서 구성원에게 기여(contribution)보다 보상(compensation)이 작았던 것이라면, 지금 벤처는 거꾸로 ‘얼마나 받을까’ 하는 보상이 ‘뭘 할까’라는 기여를 우선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그가 내놓은 뜻밖의 분석으로 다시 돌아가면, 상속을 목표로 하는 재벌 오너십에는 장기적인 안목과 위기에 대한 대처, 끝없는 긴장감 같은 장점이 생각보다 대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벤처기업인 상당수는 ‘상속’은 일찌감치 안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문제는 그 결과 일정 수준의 성장 이후 지속 가능한 성장, 100년 기업을 향한 꿈같은 부분에서 재벌보다 뒤떨어진 것이다. 오너십에는 ‘후대에게도 물려줘야 한다’는 동물적 본능에서 나오는 치열함이 있다면 벤처는 이성에 의지한 느슨함에 휩싸여 버렸다는 논리였다. 그러다 보니 ‘이 정도면 성공했다’는 벤처의 오너십 옆자리에 단기적 보상을 노리는 재무 기술자, IT 기술자 등이 득실거린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오너십이 취약해진 재벌 체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다. 한국 정치의 위기 역시 오너십이 사라진 가운데 이를 대체할 리더십의 수준이 높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는 분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한국 산업의 창업 1세대들이 이룬 성공엔 불굴의 도전 정신이 있었다. ‘임자, 해봤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와 같은 얘기들 말이다. 사업보국이란 공익적 가치도 분명 대단했다. 재벌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아니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시대다. 그래서 더더욱 K벤처의 도약을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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