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애들은 ‘노인’으로 태어난 것 같아요”
“2003년생. 손재환. 영상연기 전공. 서울. 1994년생. 투파 거주. 사미 제르자위에게. 친한 친구를 잃는 슬픔과 고통을 감히 제가 상상할 수 없네요. 제가 당신의 이야기를 제 몸을 통해 전해드릴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낭독이 끝나고 학생 배우들은 자기 이름과 태어난 곳, 지금 사는 장소를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낭독한 모놀로그(독백)를 쓴 팔레스타인의 10대 저자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사미 제르자위의 사연을 낭독한 재환 배우는 감사하다고 했다. 자신이 제르자위의 이야기를 낭독했지만, 자신은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만 당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몸’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말이다. 그는 왜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 감사하다고 했을까?
아슈타르 극장의 낭독 공연 요청
재환 배우가 낭독 공연한 사미 제르자위의 이야기는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사는 10대 31명의 이야기를 담은 ‘가자 모놀로그’의 일부다. 이 연극은 팔레스타인의 아슈타르 독립극장에서 제1차 가자지구 전쟁(2008~2009) 뒤 가자에 사는 청소년 31명이 겪은 이야기를 모놀로그로 엮어낸 전쟁에 대한 증언이다. 아슈타르 극장은 2023년 하마스의 인질 공격으로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자지구에서의 전쟁과 학살을 멈추기 위해 같은 해 11월29일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에 이 연극을 낭독 공연해줄 것을 전세계에 요청했고, 한국에서도 많은 극단과 단체가 이에 호응했다.
2024년 초부터 이 모놀로그를 올리자고 여러 차례 이야기하다가 이번 국어교사들과 함께하는 연극 연수에서 드디어 성사시켰다. 아쉽게도 몇몇 한계로 31개 이야기 모두를 낭독하지는 못했다. 참여한 학생 배우들을 중심으로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를 골랐다. 낭독을 연습하고 관극하러 온 교사들 앞에 서기까지 도움을 입고 변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의 낭독 연기를 보고 난 다음 모둠별로 낭독 연습을 하고 공연한 교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연극은 낭독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전쟁은 사람을 어른이 되게 하는 것 같아요. 어린아이로 살게 내버려두지 않아요.” 이 말은 연수가 끝난 뒤 한 국어교사가 한 말이다. 학생 배우들도 같은 말을 했다. 모놀로그에서 세이브 라드완에 사는 1996년생 야스민 카드베흐가 한 말에 대한 응답이다. 카드베흐는 가자에서는 “어른이 되는 것, 그 자체로 성취”라고 말한다. 여섯 살 아이가 가족을 돌보기도 한다면서 “팔레스타인 애들은 노인으로 태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웨흐다 대로에 사는 1993년생 아흐마디 루지는 “우린 전쟁 속을 살고 있으니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신중해야만 해요”라고 말한다. 그는 빵 한 조각을 먹더라도 만일을 대비해 조금은 남겨놓으며 따로 챙겨놓는다. 차를 만들면서도 설탕을 거의 넣지 않는다. “또 전쟁이 시작될 때를 대비해서 아껴둬야 하니까” 말이다.
샤프타위 대로에 사는 1994년생 에하브 라얀은 전쟁 전까지는 집에서 부모의 일만 돕는 ‘착한’ 아이였다. 어머니는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그를 두고 언제나 “에하브가 우리 자식 중 최고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쟁 뒤 그는 오히려 위험해진 집 바깥을 더 많이 다닌다. 동네 사람들과 체스도 두고 가까워졌다. 그는 “신이 보호해주시는 한” “이 도시의 공기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울기도 하며 이렇게 살아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보다 더 숭고한 성숙이 있을까.
연극에 답장 낭독을 포함한 이유
이번 낭독을 연출한 청강대 동료 교수 최재영은 모놀로그에서 음악도 조명도 다른 어떤 장치도 다 뺐다. 이유는 명확했다. 전문 배우가 아닌 대중의 낭독을 위한 모놀로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현실이 삶의 상상을 압도할 때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것은 최대한 가감 없는 현실의 모습, 현실의 목소리 그 자체다. 다른 장치가 덧붙여지면 그저 들어야 할 목소리 자체를 가릴 뿐이다. 형식이 낭독이어서가 아니라 들려야 할 목소리가 주인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예술이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면, 사람은 타자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들려야 할 목소리를 올려보내는 순전한 통로가 되려고 할 때 통로가 된 사람은 비로소 윤리적 주체가 된다. 재환 배우가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몸을 통해 전달할 수 있어서 고맙다고 한 이유다. 고난받는 타자에게 이용 가능한 존재로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최재영 연출이 목표한 지점이다. 최재영은 학생 배우가 모놀로그 낭독 뒤에 각자 낭독 연기한 사람에게 짧은 답장을 낭독하는 것을 극 안으로 끌어들였다.(‘가자 모놀로그’ 홈페이지에 가면 아슈타르 극장에 답장을 보낼 수 있다. 최재영 연출은 이 과정을 낭독 안에 포함했다.) 이를 통해 최재영이 연출하고자 한 이 연극의 목적은 가자와 한국, 낭독을 하고 보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다. 이 거리를 메울 수 없다는 것. 이 거리만큼이나 감히 그들이 겪는 것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선 자리가 얼마나 비참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최재영 연출은 낭독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분명히 인지할 수 있도록 답장을 쓰게 했다. 1971년생. 서울에 살고 경기도 이천에서 일하는 엄기호. 이렇게 말이다.
연극 연습 초반 “네, 연대하기 위해서요”라며 ‘연대’라는 말을 시작부터 꺼내던 배우들에게서 ‘연대’라는 말은 사라졌다. 더 나아가 연습하던 국어교사들은 “알 수 없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해도 될까요?”라며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조차 두려워하게 됐다. 답장을 극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연결은 뜨거운 것이 아니라 서늘해졌다.
공감은커녕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음이 이 연결의 윤리적 자리다. 그 자리에 서야 할 수 있는 것이 보인다. 공감할 수 없어 좌절하여 혹은 공감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는 것조차 죄스러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공감할 수 없기에 답장을 보낼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죄인이 되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모놀로그에 참여한 다수의 학생 배우와 국어교사는 재환 배우처럼 답장을 쓰면서 이 점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가자의 참혹함, 비참을 넘어 비극이 되다
답장이 극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학생들은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그가 낭독/연기해야 할 사람의 행동을 읽으려 했을 테고, 그의 행동을 읽었다고 생각하고 말/행위를 낭독/연기했을 것이다. 반면 답장이 극에 들어옴으로써 배우와 관객들은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했다. 그러면 당혹감 속에서 낭독하는 이와 듣는 이는 고민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낭독/연기하는 나/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불가능함에 대한 고민을 거친 뒤 나오는 응답이야말로 제대로 된 응답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그저 나/우리가 너를 낭독/연기한 후에 하는 ‘후기’일 뿐이다. 후기는 결코 너를 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 역시 ‘나’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너’를 제대로 흉내 냈는지 그러지 못했던 것인지, 너를 거울삼아 내 모습의 잘남과 못남을 이야기하는 뻔뻔한 나르시시즘이다. 물론 그중 최악은 너를 통해 불행한 줄로만 안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모르고 투정만 부리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식의 ‘후기’일 테고 말이다.
그럼 나/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비극’을 쓴 테리 이글턴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연극이라고 말이다. 실생활의 참사, 그것을 말로 드러내고 그 말의 형태가 잡히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고 연극이라고 이글턴은 말한다. ‘가자 모놀로그’는 훌륭한 예다. 폭격으로 폐허로 바뀌고 있는 가자의 극장에 31명의 청소년이 모여 자기 경험을 말하고 아슈타르 극장은 ‘모놀로그’의 형태를 잡았다. 그렇게 가자의 참혹함은 비참을 넘어 비극이 됐다.
그리고 그 모놀로그는 한국에 와 많은 극단과 배우의 제안·주도로 시민들과 함께 하는 낭독으로 형태를 잡았다. 거기에 최재영 연출은 참여한 사람들이 31명의 청소년과 아슈타르 극장에 답장하게 하는 새로운 형태를 잡아 참여한 사람들이 공감도 짐작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고백하게 해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감히 말하자면 그 형태/양식을 찾아내고 잡아주는 것이 예술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알 수도, 공감도 할 수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말에 대한 답이 있는 것이다. 연극(예술)을 하지요. 타자에게 순전히 자기를 내어주며 응답하는 은혜를 입는.
모임 시작 전 모놀로그 한 편 읽기
번역자 15명이 ‘가자 모놀로그’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번역자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가자 모놀로그’ 홈페이지(https://www.gazamonologues.com/copy-of-team)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모놀로그는 계속해서 업데이트되고 있다. 또한 공연한 이후에, 혹은 공연에 답장을 포함했다면 그 답장을 아슈타르 극장에 보낼 수 있다. 학살과 전쟁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이 함께해주셨으면 좋겠다. 전체 공연을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모임 시작 전에 모놀로그 하나라도 읽고 답장한다면 이것이 네타냐후 정권에는 가장 무서운 전세계적인 연대가 될 것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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