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오늘]나이
스포츠 중계에, 종종 전성기가 지난 선수가 그에 버금가는 실력을 선보일 때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말이 등장한다. 스포츠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노장의 활약 뒤에는 이 말이 붙곤 한다. 요즘 이 말은 처세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동안이 강조되는 시대다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거 아냐”라는 말을 인사치레로 하는 경우도 있다. 내남없이 건강한 삶을 꿈꾸는 세상에서 이 말은 그만큼 값어치가 높은 축에 든다.
나이를 거꾸로 먹진 않지만, 나이가 멈춰버린 여성이 있었다. 물론 현실에서의 일은 아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의 주인공 아델라인 보먼(블레이크 라이블리)은 100년째 29세를 살고 있다. 폭설이 내리던 날 그가 운전하던 차가 호수에 빠지고, 목숨은 건졌지만 아델라인은 그날 이후 더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처음엔 좋았다.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인가. 하지만 현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점점 나이를 먹는데 자신만 그대로였으니,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영국으로, 다시 미국으로, 10년 주기로 이름과 신분을 바꾸며 살아야만 했다. 사랑이 찾아와도 늘 떠날 준비를 해야만 했다. 고독, 외로움이 엄습했다. 아델라인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늙어갈 수 없는 운명이 아팠다. 다시 큰 교통사고를 당한 아델라인은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1년 후 거울을 보다가 새치 하나를 발견한다. 아델라인의 한마디는 이랬다. “완벽해.”
나이가 멈춰버린 사람보다 더 극적인 사람, 즉 나이를 거꾸로 먹는 사람도 있었다. 이번엔 영화가 아닌 소설 속 일이다(2009년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동명 영화가 있었지만, 원작과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주인공 벤자민 버튼은 “일흔은 족히 되어 보이는 노인”으로 태어났다. 머리는 “거의 백발”이었고 뺨에는 “잿빛 수염”이 길었다. 놀라지 마시라. 갓 태어난 아들을 확인하기 위해 신생아실에 들어선 아빠에게 “댁이 내 아버지인가?”라고 물었다. 가족들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벤자민도 자신의 “몸과 마음의 명백한 성숙도”가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부모가 벤자민에게 익숙해진 것은 열두 살 즈음이었다.
놀라운 일은 계속되었다. 열여덟 살 벤자민은 “쉰 살의 남자처럼” 꼿꼿해졌다. 문제는 외부의 시선. 예일대에 합격했지만 수강신청부터 난항이었다. 담당 직원은 벤자민에게 “아드님 문제로 오셨군요”라고 인사했다. 예일대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났다. 집안 사업은 번창했고, 사랑하는 여성을 만나 결혼도 했지만, 만사형통은 아니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게 말썽이었다. 아내는 40대에 들어섰지만 벤자민의 몸과 마음은 30대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장성한 아들은 집에 손님이 오면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어쨌든 벤자민은 계속 나이를 거꾸로 먹었고, 끝내 신생아의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델라인은 힘겨워도 나이가 멈춘 삶을 어쨌든 긍정하려 했다. 벤자민은 남이 뭐라 하건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나이가 멈춘, 혹은 거꾸로 먹는 전대미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자기만의 삶을 살아낸 셈이다. 아델라인과 벤자민에 비해 정상적 삶, 즉 나이를 제대로 먹고 있는 우리 삶은 어떤가. 자기만의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가.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말 옆으로 “어른이 없다”는 말을 슬쩍 붙여본다. 나는 제대로 나이를 먹고, 그 나이에 걸맞은 어른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 쉽게 대답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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