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R&D가 가짜 노동이 되어선 안 돼

기자 2024. 8. 2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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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인류사회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는 그의 대표 저서 <가짜 노동>에서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고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일을 가짜 노동으로 정의한다. 조직으로 치면 가치 창출보다 바쁘게 보이는 게 목적인 노동이다. 지식기반 사회에서도 산업사회 때와 같이 일에 투입된 시간을 기준으로 보상하는 관행이 근본 원인이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 특히 가치를 확신할 수 없는 일의 복잡성과 불분명하고 공허한 말의 남용이 가짜 노동을 심화시킨다.

정부는 2024년 대규모 연구·개발(R&D) 예산 감축의 후속 조치로서 ‘R&D다운 R&D’를 내걸고 잇따라 제도개선 방안을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게 예비타당성조사(예타) 폐지와 평가위원 상피제 축소다. 예타는 대규모 국가재정 투자 전에 타당성을 검증하는 제도로서 1999년 도입돼 R&D 분야에는 2008년부터 적용됐다. 창의·도전성과 신속성이 요구되는 과학기술 분야 특성상 연구 기획부터 예타 후 예산 확보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게 폐지 이유다.

그러나 그 과정을 살펴보면 정책의 방향성에 의문을 갖게 된다.

정부는 작년 말 예타 제도 선진화를 위해 공청회를 개최하고 올해 1월 ‘국가연구개발사업 예비 타당성 조사 제도 개편 방안’을 수립해 3월부터 시행한다고 밝힌 바 있다. 예타 조사의 합리성은 제고하되 대형 R&D 투자의 재정건전성은 강화하는 쪽으로 제도를 개선해 계속 시행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현행 규정인 예타 운용 지침에 근거해서도 필요시 예타를 면제할 수 있지만 연구 현장의 의견을 반영해 일부 내용을 개정하되 제도는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6월 들어 갑자기 제도 폐지 방침이 발표됐다.

평가위원 상피제 축소도 마찬가지다. 4월 말 ‘국가연구개발 과제평가의 전문성·투명성 획기적 제고’란 제목의 보도자료가 배포됐다. 평가의 공정성을 위해 피평가자와 이해관계가 있는 평가자를 제외하는 상피제가 과도하게 운영돼 해당 분야 최고 전문가가 평가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는 게 제도 축소 이유다. 이에 따라 상피제 적용 범위를 ‘동일기관’에서 ‘동일기관의 최하위 단위 부서’(대학의 경우 같은 학과나 학부)로 좁혀서 평가자 풀(pool)을 늘리고 이를 위해 관련 법령을 개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준은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 시행된 2021년부터 동법 시행령 제27조에 명시돼 연구 현장에선 이미 시행 중이다. 일부 평가기관에서 이 조항을 보수적으로 적용해 ‘동일기관’을 기준으로 상피제를 운영하는 사례가 있다고 하나, 그것은 사업 규모나 특성을 반영해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한 합당한 조치일 수 있다.

작년 7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OECD Reviews of Innovation Policy: Korea 2023”란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한국은 인적 자본과 연구비 지출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투입을 자랑하지만, 장기적·종합적 안목으로 새로운 사회적 도전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일관된 정책을 개발하기보다는 단순히 부처 간 경쟁을 통한 예산 및 사업 조정에 지나치게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학기술을 통한 혁신이 한국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선 다양한 부문의 장기 전략을 하나로 묶는 공유된 비전이 필요하고 임무 지향적 정책을 실험하며 정책의 연속성을 보장할 것을 권장했다.

뇌르마르크의 후속작 <진짜 노동>에 따르면 소규모 회사보다 대기업과 공공영역에서 가짜 노동 비율이 훨씬 높다고 한다. 최근 정부는 큰 폭의 내년도 R&D 예산 증액을 예고했다. 일관되고 실효성 있는 정책 지원으로 연구의 효율성은 높이면서도 불필요한 행정부담이나 혼란은 최소화해야 한다. 급변하는 과학기술의 특성을 고려하되 멀리 보고 준비할 수 있는 여유와 역량이 필요해 보인다.

송병찬 한국연구재단 연구위원

송병찬 한국연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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