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딴따라, 멸칭의 동시대 의미

이상헌 춤 비평가 2024. 8. 21. 18:2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20년대 코팍춤 등 인기, 흥 나누면서 용어 발생설
일제의 세뇌로 의미 변질…예술가, 진면목 되찾아야
이상헌 춤 비평가

멸칭은 사람이나 사물을 낮추어 경멸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대중이 공유하는 멸칭의 공통점은 대상이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고, 그 시대가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도무지 티끌만큼의 권력도 없는 계층을 부르는 멸칭도 있는데, 예술인을 지칭하는 딴따라가 대표적이다. 딴따라의 유래에 관해 몇 가지 설이 있다. 그중에 기록이 남아 있는 설이 있는데, 한국 전문 춤 평론 1세대 조동화의 증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동화는 현장 예인을 지칭하는 비속어 딴따라는 해삼위(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해삼이 많이 나서 붙인 이름) 학생음악단 공연에서 기원한다고 말했다. 공연 중 코팍춤 순서에서 관객이 러시아 음악에 맞춰 손뼉을 치며 입으로 박자를 맞추던 ‘딴따라, 딴따라’가 자연스럽게 입에 익어서 생긴 말이라고 했다. 코팍춤은 우크라이나의 민속춤인데, 팔짱을 낀 채 허리를 세우고 쪼그려 앉아 양발을 차례로 뻗고 접기를 반복하는 춤이다. 1921년 해삼위에서 온 동포 11명이 원산에서 시작해 서울과 전국 각지를 돌며 30일 동안 공연했다. 레퍼토리는 러시아풍의 춤과 음악이었는데, 서울 공연은 한 번에 1000여 명의 관객이 장사진을 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해삼위 학생 공연단 구성은 10대에서 20대 초반으로 모두 러시아에서 태어난 청소년이었다. 지금의 아이돌 구성과 닮았다. 구성만이 아니라 춤과 음악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는 점에서 당시 학생공연단은 조선의 아이돌이었을 것이다.

해삼위 공연이 있었던 1920년대 초에 춤은 무도로 불렸다. 그 이전에는 가무 도무 등이 춤을 일컫는 말이었다. 1920년 무렵에야 무용이란 용어가 일본에서 수입됐는데, 처음에는 거의 쓰지 않았고, 무도의 사용 빈도가 훨씬 높았다. 무도는 주로 서양의 사교춤을 말할 때 쓰이다가 해삼위 공연으로 춤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이 시기를 한국 무용사에서 ‘무도 시대’라고 부른다. 무도 시대는 1920년에서 1925년까지로 한정하는데, 이 시기에 무용 연극 학원과 개인 교습소가 생겼고, 무도장 광고도 등장한다. 강습회와 무도 대회가 수시로 열렸는데, 어린이 무도회부터 성인 무도회까지 열릴 정도로 춤 열풍이 휩쓸었다. 물론 도시에 한해서다. 지나쳤던 것이었을까. 이런 상황을 두고 춤이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해삼위 공연 때만 해도 남녀가 접촉하는 춤이 없었고, 사교춤 모임에 여성 출입을 금해 남자가 여성 역할을 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이후 1924년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열린 무도회는 남녀 가리지 않고 유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났고, 급기야 1926년에 풍속을 해치는 사교춤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이 제출됐다.

조동화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딴따라는 공연자와 관객이 흥을 나누면서 자연스레 생긴 표현이다. 춤을 중심으로 한 공연에 전통적 윤리를 갖다 대면서부터 처음에는 예술인을 무시하는 의미가 아니었던 딴따라의 의미가 변하기 시작했다. 어떤 예술 장르가 대중에게 퍼지는 현상은 시대적 요구 때문이다. 무도 시대는 3·1운동 직후 일제의 문화통치가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사람들은 가혹한 일제 통치에서 잠깐이나마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당시 민속예술은 본래의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맥락을 잃고 있었으니, 외국에서 들어 온 코팍춤이나 사교춤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대중문화 현상으로 번져나갔다.

일제는 통치 권력에 우호적인 지식인 언론 종교계를 내세워 자유를 느끼게 하는 춤의 확산을 억제했다. 이렇게 공연 현장에서 자연스레 생긴 딴따라는 식민지 지배 권력의 이해와 부딪히면서 공연 예술인을 지칭하는 멸칭이 됐다. 딴따라가 하는 일은 하찮고, 쓸모없으며, 따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 잡게 됐다. 한번 자리 잡은 멸칭의 의미는 시대가 달라져도 바뀌지 않았다.


반면 스스로 딴따라를 자처하는 이들도 있다. 극악한 시대에도 사랑 노래를 부르고, 웃음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연가와 코미디로 사람들의 상처를 달래고,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해 주는데, 여기에는 짙은 페이소스가 깔려 있기도 하다. 현대판 딴따라는 더 나아가 교묘하게 은폐된 억압과 배제를 들추어내어 현실 모순을 까발린다. 이를 위해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자기 세계에만 빠져 있기보다 스스로 멸칭에 몸을 담근다. 경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바싹 다가가 경멸과 왜곡을 무력화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100년 전 딴따라라는 말이 처음 생겼을 때, 해삼위 공연단이 관객과 소통하면서 신명을 나누던 방식을 동시대 의미로 되찾는 방법일 수 있다. 그렇다고 멸칭을 되돌려 다시 사용하자는 말이 아니다. 멸칭의 변천사가 지금 공연 예술인들에게 던지는 의미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