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에만 집착했던 삶, 바다가 치유해줘"

박재영 기자(jyp8909@mk.co.kr) 2024. 8. 2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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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여성 최초 무동력 요트 세계일주 이나경씨
보험계리사 경력 뒤로하고
세계일주 요트대회 출전
11개월간 7만4천㎞ 완주
위험도 숫자로 컨트롤 가능
직업에서 비롯된 강박증
죽을 위험 넘긴 후 변화돼
"인생은 매일 크고 작은 도전
통제보단 흐름에 몸 맡기길"
클리퍼 세계일주 요트대회에 참가 중인 이나경 씨.

"모든 위험을 숫자로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 보험 업계에서 계리사로 10년 가까이 일했어요. 하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쳐본 바다는 그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는 장소였죠."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에서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독일과 싱가포르의 재보험 업계에서 근무하던 이나경 씨(38)의 삶은 안락하고 평온했다. 계리사인 그의 업무는 '위험 관리'를 위해 리스크를 수치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안정된 직장과 금융계 커리어를 뒤로한 채, 돌연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몸을 던졌다. 길이 23m짜리 요트에 의지해 바람과 파도의 힘만으로 4만해리(약 7만4000㎞)를 항해하는 여정에 나섰다.

지난달 이씨는 전 세계 바다를 11개월간 요트로 항해하는 '클리퍼 세계일주 요트대회(Clipper Round the World Yacht Race)' 완주에 성공했다. 한국 여성 최초이자 한국인으로선 두 번째 기록이다. 그가 속한 다국적 팀 베케젤라(BEKEZELA)는 지난해 9월 영국 포츠머스에서 출항해 스페인, 우루과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베트남, 미국, 파나마 등의 14개 항을 거쳐 포츠머스로 돌아왔다.

매일경제와 인터뷰하면서 이씨는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와 격리 생활 중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고 말했다. "평생 안정감과 편안함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어딘가 허전함을 느꼈어요. 그전까지 제 삶의 선택 대부분은 내면의 소리보다는 주변과 사회의 관점에 의해 이뤄졌죠." 이어 그는 "지금껏 미루기만 했던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정리해봤다"며 "그중에 가장 위험하고 어려워 보이는 것을 고른 게 바로 요트 세계일주"라고 했다.

무동력 요트 세계일주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여정이었다. "24시간 항해해야 하는 요트의 특성상 3교대로 근무해야 했어요. 잠은 길어야 4시간30분, 짧게는 1시간30분밖에 잘 수 없는 생활이었죠. 참가자의 60%가 중도 포기할 정도로 고된 과정이에요."

호주 동남쪽 태즈먼해에서 강풍과 파도를 맞닥뜨렸을 땐 죽음의 공포가 그를 덮쳤다. "바람이 너무 강해 돛을 다루기가 거의 불가능했어요. 배는 몇 번이고 뒤집힐 뻔했죠. 배에서 떨어지면 실종되거나 심장마비, 저체온증으로 위급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과거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던 클리퍼 세계일주는 가장 위험한 항해 대회 중 하나로 꼽힌다.

힘든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방이 트인 망망대해에서는 바다 위로 달이 뜨고 지는 모습도 볼 수 있어요. 제가 아는 단어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벅찬 광경이었죠. 돌고래들이 자주 놀러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운이 좋은 날엔 고래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어요."

11개월의 대장정을 마친 이씨는 세계일주가 자신의 인생관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보험사에서 일할 땐 모든 것을 숫자와 통계 안에서 컨트롤해야 된다고 믿었어요. 제 삶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안정을 추구할수록 그중에서 컨트롤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고민은 더 커지곤 했어요."

그는 바다에서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공간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꼈어요.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모든 걸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만 이씨는 "사실 제가 배운 것들이 꼭 바다에 나가봐야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며 "세계일주를 꼭 해봐야 한다고 권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매일 크고 작은 도전에 직면하며 살고 있어요. 제 여정의 기록이 도전을 앞둔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도전 뒤엔 값진 깨달음이 꼭 함께 올 것이라고 전하고 싶어요."

[박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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