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조각난 지구와 ‘쥐사슴’이 한 지붕 아래서…부산 그곳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재림한 것일까.
지금 부산 옛도심 초량동의 한 양옥집 안에는 네발 달린 ‘쥐사슴’ 아홉마리가 쉬고 있다. 그네들은 나무로 깎은 몸을 2층 살림집 테라스 난간 위에 걸쳐놓고 정면의 숲을 넌지시 바라본다.
지은 지 50여년이 지난 살림집 내부 곳곳에 친근하면서도 기괴한 상들이 널렸다. 쥐사슴 노는 테라스 안쪽 방엔 타일과 벽지를 떼어낸 벽체에 사람 머리상들이 붙었고, 바닥엔 일본 신사의 축소 모형이 놓였다. 무당과 할머니, 군인, 악사들을 형상화했다는 알록달록한 무늬의 각양각색 병풍들도 서있다. 1층 현관엔 합성수지로 만든 분홍빛 계곡물이 흐르는 모양으로 굳어 있고, 귀여운 인형들이 나무와 어우러지는 영상 스크린도 곁에서 흘러간다.
살림집 얼개도 특이하다. 1960년대 지은 양옥. 옥상엔 족욕장, 지하엔 아이들을 위한 얕은 풀장까지 남았다. 구멍 여섯개가 송송 뚫린 램프 구조물 안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깨진 지구본 조각들이 구름 낀 하늘과 마주한다. 옥상 주위로는 20층을 넘는 고층아파트들이 둘러싸고 있고, 저 멀리 낮고 푸른 야산 풍경이 들어온다.
부산역에서 북쪽 구봉산 기슭으로 가는 길에 펼쳐진, 산복도로 낀 동네가 초량동이다. 외지에서 숱한 상인들과 난민들이 드나들었던 부산 도시사의 디엔에이(DNA) 같은 곳이다. 지난 17일 시작된 현대미술 행사인 ‘부산 비엔날레 2024’에서 특유의 불온함과 도발성을 즐기려면 초량동 주택가 안쪽 골목 국내외 작가 8명의 특설전시장인 ‘초량재’ 살림집으로 가야 한다. 덩이감이 가장 큰 출품작은 정유진 작가의 ‘포춘어스’. 거대한 지구본의 파편들이 옥상 바닥에 놓인 설치작품을 통해 미래 디스토피아에 대한 불안감을 풀어놓았다. 2022년 만든 이 작품은 1960년대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진 당대 유한층 고급 가옥의 맨 위에서 부산의 하늘을 마주보면서 역사와 도시, 자연의 접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층 난간 위에 올라앉은 채 집 정원을 나란히 지켜보는 목제 동물상들은 동남아시아 작가 슈쉬 슐라이만과 아이 와얀 다르마디의 작업이다. 말레이지아 등 동남아 여러 곳들을 돌면서 수집한 나무들과 생명체에 얽힌 토착 설화들 속에서 이런 나무상과 구도를 착상한 것이라고 한다.
20세기 초부터 산자락에 보금자리를 잡고 삶을 꾸려가고 희망을 엮었던 사람들, 그들 위로 겹쳐진 도시의 역사, 과거 집을 드나들던 이들의 건축관과 생각들이 지금 불안 속에 폭염 등의 기후변화를 실감하며 작품을 보는 21세기 관객들의 심리와 의식 위로 차곡차곡 겹쳐진다. 이 역사적 공간적 풍경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낯설고 생경한 공간에서 느껴지는 이상스런 편안함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초량재는 한국의 주요 격년제 국제미술제로 광주와 맞수 구도를 형성한 부산비엔날레 2024에서 유일하게 도발적이고 역동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는 베라 메이, 필립 피로트가 전시 감독을 맡은 이번 비엔날레는 ‘어둠에서 보기’란 주제 아래 36개국에서 찾은 작가 78팀이 349점의 작품을 주전시장인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과 중앙동 등 구도심 일대의 부산근현대역사관, 한성1918에서 전시한다. 2년 전 김해주 기획자가 맡았던 2022년 비엔날레 때도 초량동 주택 공간은 등장했지만 이번 공간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었다.
올해 두 감독은 미국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1961~2020)의 책 ‘해적 계몽주의’에서 전시 영감을 얻어 해적 집단 사회의 유연성과 평등주의를 불교 도량의 자기를 낮추는 깨달음의 수행과 함께 화두로 내세웠다. 초량재를 제외한 다른 전시장은 가벽 없는 차분하고 널널한 전시 배치와 동남아, 아랍 등 낯선 지역 작가들의 수작들을 대거 선보이는 등의 차별적 요소가 돋보이긴 한다. 하지만 비엔날레 특유의 불온한 도발성은 초량재에서만 감지할 수 있고, 본전시나 근대역사관 등의 전시는 도심에 남은 역사적 역동성의 흔적들을 십분 살리지 못했다. 미술관 기획전처럼 안전하고 평이한 형식 틀 속에 내려앉아 정제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최근 퇴조기 비엔날레의 양상을 선연하게 드러냈다.
주제를 의식하지 말고 개별 작품들이 각각 다기하게 던지는 형식적 울림과 메시지를 찬찬히 생각하면서 감상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 면에서 부산현대미술관 1층 들머리에 나온 화승 송천스님의 역작인 ‘관음과 마리아-진리는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다’(2024)란 불화풍 작품이 눈에 맞춤하다. 비단 위에 천연안료로 그린 성모 마리아상과 전통한지에 그린 관음보살의 상을 나란히 내걸어 종교적 진리의 공존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설파한 작품이다.
2022년 독일 카셀도큐멘타에 인도네시아의 군부독재에 항의하는 걸개그림을 출품했다가 반유대주의 도상이 들어있다는 비난을 받고 작품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던 인도네시아의 현실참여 예술가 모임 타링 파디도 2024년 부산비엔날레에 참여하고 있다. 부산현대미술관 1층의 비엔날레 본전시장에 올봄 현지 총선 이후 폭등한 쌀값을 허수아비 아래 항의하는 군중들의 도상과 걸개그림으로 풍자한 인상적인 그림들과 쌀푸대 등을 출품했다. 타링 파디는 1998년 인도네시아의 예술 중심지 족자카르타에서 예술학도들과 사회운동가들이 함께 결성한 모임으로, 농민공동체와 연대하면서 다양한 참여미술 운동을 벌여왔다.
사회 변혁적 예술의 측면에서 부산현대미술관 2층 안쪽에 내걸린 홍진훤 작가의 사진 아카이브 작품공간 ‘글리치 바리케이드’도 지나칠 수 없다. 1980~90년대 민주화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을 기록한 서영걸 사진가의 사진 작품들과 현상 과정에서 잘못된 오류투성이 사진 이미지들을 함께 뒤섞어 배치하면서 당대 변혁을 꿈꾸었던 이들의 팍팍했던 시공간을 새롭게 소환하고 있다.
현재 국내 여성 화단에서 가장 돋보이는 화력을 펼쳐 보이고 있는 방정아씨의 대형 신작들은 최근 그의 화력이 종교와 생태의 지평으로 다가가면서 더욱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산현대미술관 지하층에 내걸린 아크릴화 신작들인 ‘물 속 나한들’과 ‘자라나는 발톱-되기’ ‘언제든지 난 너의 배에 탈 수 있어’가 그것이다. ‘물 속 나한들’은 남성상으로 묘사되는 전통 불화의 나한상 구도를 깨고 물속에서 부유하는 지금 시대 여성들의 모습을 담아냈고, ‘자라나는…’은 인공적인 개발과 조작이 되려 인간 삶을 위협하는 현재 인류세에서 바위의 거북손과 거북손처럼 변해가는 사람의 발톱을 한 화면에 묘사하면서 자연으로 다시 융화되어가는 역발상의 사유를 펼쳐 보인다. 불국정토로 가는 배(반야용선)에 탄 현대인들의 다기한 양상들을 담은 ‘언제든지…’는 우리 모두가 세상의 환난을 딛고 서야 할 운명공동체임을 일러주고 있기도 하다. 10월20일까지.
부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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