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 번호표 뽑으세요” 결재받느라 ‘북새통’…광주·전남·북 시장·군수님은 ‘외출 중’
차기선거 의식 ‘눈도장 찍기’ vs 주민과의 소통 ‘행정 서비스’
(시사저널=정성환 호남본부 기자)
20일 오후 3시 40분쯤, 전남 광양시장 비서실 한켠에 은행이나 관공서에서나 볼 법한 번호표 발행기가 놓여 있다. 이 발급기는 정인화 광양시장에게 결재 받으려는 공무원들의 순번을 정하기 위해 설치됐다. 시장실에 번호표 발급기 등장은 정 시장이 외부 행사에 치중하느라 정작 시청 내부 결재가 밀리면서 빚어진 생경한 모습이다. 이날(화요일)도 결재일이지만 발급기에 찍힌 대기자 수는 '0'명이었다. 때마침 을지연습 기간을 맞아 청내에 머물게 된 정 시장이 하루 앞당겨 결재했기 때문이다. 시장실 출입문 오른쪽에 붙어있는 집중 결재시간 등의 내용이 담긴 비서실 명의 협조문도 눈길을 붙잡았다.
시장실인가 은행인가…광양시장실, 대기 번호표까지 등장
시장실에 번호표 발행기가 반입된 사연은 이렇다. 정 시장의 공식 결재 시간은 매주 화요일, 목요일 단 이틀이다. 그러다보니 이날 오후 4시쯤이면 시장 비서실은 몰려드는 공무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시장 결재 순서가 선착순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시장 비서실에는 선착순으로 대기하는 공무원들과 이를 비집고 양해를 구해 선결재하는 '새치기족'까지 나오자 지난해 하반기 시청 한 공무원의 제안으로 순번 대기표 발급기가 설치됐다.
번호표 발급기 도입을 두고 시청 안팎의 시선은 갈린다. 우선 질서 있는 결재로 대기에 따른 업무 비효율성을 줄일 뿐만 아니라 행여 발생할 수 있는 '문고리 권력' 등장에 따른 위화감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측면에서 직원들이 반기고 있다는 것이 광양시의 설명이다.
무엇보다 번호표 기계 앞에 모든 직원이 직급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대접받는다는 측면에서 만족도 제고에 기여하고 있다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이 또한 업무상 급작스럽게 결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겨도 상급자가 대기 중이면 우선 결재 받기가 힘들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반면 시의회와 일부 직원은 번호표 도입에 따른 호불호 논란은 곁가지에 불과하며 근본적으로는 시장이 차기 지방선거 등을 의식해 눈도장 찍기식 바깥 행사에 쫓아다니는 바람에 정작 시청 내부 결재가 지체되고, 번호표 발급기까지 등장한 현실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바빠서…" 광양시장, 연간 결재 시간은 '58시간 30분'
그렇다면 광양시장의 결재 현주소는 어떨까. 광양시의회가 새올행정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정 시장의 결재 일수는 공휴일을 제외한 나머지 247일 가운데 43일, 총 소요시간은 58시간 30분으로 대면 결재가 월 평균 7회에 불과한 실정이다.
서영배 시의원은 최근 열린 임시회 본회의에서 5분 자유발언에서 "시장의 결재 시간이 지나치게 부족해 시정 운영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불필요한 외부 행사 시간을 줄이고 내부 업무에 집중해 달라"고 꼬집었다.
서 의원은 "대기표는 미봉책일 뿐"이라며 "결재가 신속히 이뤄지지 않아 시민들의 다양한 행정수요에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고 중요한 사항들이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못해 행정 업무의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광양시 관계자는 "시장 결재 시간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나 결재가 늦어져 업무를 처리하지 못하거나 연기되지는 않는다"며 "각 사회단체나 산하기관, 행정부서 등에서 시장님을 행사에 모시고 싶어 행사 일정을 조정하는 상황도 발생해 참석 여부를 일괄적으로 결정하기가 쉽진 않다"고 말했다.
광양시장의 일정 조율은 지역 사회단체나 읍면동이 해당 시청 부서에 신청하면 총무과에서 취합해 비서실에 제출한 뒤 정 시장이 직접 참석 행사를 선택하는 구조다.
'손잡아 줘야 표나온다'…하루 5~6개 행사 참석은 '보통'
너나없이 자치단체장들이 집무실을 자주 비우고 있다. 장소는 어디든 가리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내밀기 위한 '행사 행정'에 열을 올리고 있어서다. 이 때문에 본연의 업무인 행정은 뒷전이고, 공무원들은 결재받기도 힘든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표를 의식한 전시행정이란 시각이 있다. 지난 지방선거 당선에 대한 사례 형식의 '얼굴 부조'이거나 차기 선거를 의식해 주민들에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을 겨냥해서다. 이에 따라 행정 업무의 품질 저하 우려도 낳는다. 반면에 주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몸짓'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 주민 위에 군림하던 관치시대에 볼 수 없었던 행정변화라는 것이다.
시장군수의 외부 발걸음이 잦아진데는 자치단체장의 참석을 강요하는 민간단체의 요구가 큰 몫을 한다. 최근 전남북지역 기초·광역단체장 비서실에는 행사 초대장이 하루 3~6장씩 쌓인다. 더러는 주말과 휴일 하루 10개를 웃도는 행사를 돌면서 개인 일정을 포기할 정도다. 광역이건 기초단체이건 2년 후 단체장 선거를 의식해 빡빡한 일정이지만 유권자의 표를 생각해 각종 단체의 참석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단체장이 시간에 쫓겨 가지 못하면 '미안하다'는 전화라도 한 통 해줘야 마음이 놓일 정도다.
각종 단체가 시장과 군수, 구청장 등 기관장을 초청하는 이유는 행사의 위상 때문이다. 평소 접하기 어려운 기관장을 불러 단체와 대표의 입지를 세우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 단체장 참석 여부가 주최 측의 영향력과 지역에서 차지하는 행사의 비중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어서다. 이 때문에 행사의 성격과 무관해도 일단 도지사나 시장군수에게 초청장을 보내기 일쑤다.
덩달아 단체장도 주로 힘센(?) 관변단체 행사에 많이 참석한다. 보통 회원이 많을뿐더러 소규모 모임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들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전북의 한 군수는 관변단체가 초청하면 잠시라도 눈도장을 찍고 온다고 하소연했다. 게이트볼대회, 생활체육 배드민턴대회 등 자신을 알릴 수 있거나 유권자가 많이 몰리는 자리다. 주말·휴일에도 숨 돌릴 틈이 없다. 각종 직능단체, 경제인협회, 시민사회단체 체육대회는 물론 소모임에도 시간을 쪼개 열심히 얼굴을 내민다.
전남의 전직 군수 A씨는 "이맘때 불러주는 사람이 많지만, 다 갈 수는 없어서 회장, 단체 회원이 누군지와 성향 등을 살펴보고 갔다"며 "회장 입지를 세워 주는 행사는 가급적 피하지만 나중 일을 생각해 부득이하게 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생활체육협의회나 새마을, 적십자, 바르게살기, 여성회, JC 등 사회봉사단체 등 단체를 선호한다"면서 "회원들을 격려한다는 명목이지만, 실제로는 선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쌓이는 힘센 단체 '초대장'…대규모 행사 만들어 '치적 홍보'도
봇물을 이루는 단체장의 행사 참석은 비단 외부 초청뿐만 아니다. 다수 지자체는 대규모 주민을 한거번에 접촉할 수 있는 '행사'를 만들어 치적 홍보에 열을 내고 있는 실정이다. 전북특별자치도의 경우 김관영 도지사는 도민과의 대화를 위해 지난 5월 2일 익산시를 시작으로 14개 시군 방문에 나서 지난달 26일 완주군을 끝으로 80여 일 간의 일정을 소화했다. 김 지사는 이 기간 동안 6100여 명의 도민들을 만났다.
김 지사는 지난달 24일 오전 9시 30분 남원시청을 방문, 1층 로비에 도열해 있던 시청 공무원들을 격려했다. 곧바로 10시께 의회 청사로 자리를 옮겨 김태영 시의장과 시의원들과 지역 현안과 건의사항을 논의한 그는 10시 30분 다시 시청 중회의실로 이동해 기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지역의 분위기와 여론을 경청했다.
이어 오전 11시 시청에서 3㎞ 남짓 떨어진 춘향문화예술회관에서 남원시민과의 대화 특강을 통해 민선 8기 전반기 도정 성과와 주요 정책 방향을 설명하고 주민 건의사항을 청취한 뒤 노인복지관과 공설시장을 잇따라 방문해 상인들을 격려한 뒤, 사회단체장들과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 2시 장수군청에 도착한 김 지사는 군의회, 주재 기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며 의견을 청취하고 한누리전당으로 자리를 옮겨 오후 3시부터 300여 장수군민이 참석한 가운데 '도민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1시간 정도의 도민과의 대화를 끝낸 김 지사는 장수군노인장애인복지관을 방문해 관계자와 이용자를 격려한 뒤 장날을 맞은 장계전통시장을 찾아 직접 장을 보며 시장 상인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격려한 뒤 오후 7시 장수군 기관·사회단체장들과 순대국밥으로 만찬을 한 뒤에야 '행사'로 일관된 하루 일정을 마감했다.
사정은 강기정 광주시장이나 김영록 전남도지사도 비슷하다. 재청 근무하는 날을 헤아리는 게 오히려 쉬운 형편이다.
기초단체장은 더하다. 선거구가 좁다 보니 얼굴을 보이고 손이라도 잡아 줘야 표가 나온다. 집무실에 앉아 있을 새가 별로 없다. 전남지역 B 단체장의 5월 첫째주 첫 일과는 관내 한 식당에서 공무원 20명을 초청해 대화를 갖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 오전 11시 근로자 수 300명 이상인 기업체 대표를 초청 간담회를 갖고 시정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고, 오후 7시에는 한 동민의 집에서 열린 독서상 수상 축하연에 얼굴을 내밀었다.
다수의 시장·군수는 읍·면·동 마을 단위 행사는 물론 마을부녀회 행사, 심지어 의용소방대장, 이장 퇴임식에까지 꼬박꼬박 얼굴을 내밀고 있다. 김성 장흥군수는 9일 간의 물축제 행사기간 내내 살수대첩 거리퍼레이드에서 1만5000여명의 참여자들과 함께 물총싸움하고 물고기 맨손잡기를 하기도 했다.
단체장들 역시 나름 고충이 크다. 크고 작은 단체가 주관하는 행사에 불참이라도 하면 당선되고 나더니 사람이 변했다는 등 비난성 돌직구가 날아오는 게 다반사다. 물론 단체장들이 꼭 낯내기 행사에만 참석하는 것은 아니다. 전국대회 출전 선수단 결단식이나 기업 유치나 투자 유치 협약식, 관공서 및 복지시설 준공식, 장애인 등 소외계층 행사가 대표적이다.
두 개의 시선…'자치 행정의 기본' vs '행정 품질 저하'
이처럼 각종 행사장에 쫓아다니느라 자치단체장들은 차분히 지역의 명운을 가를 정책을 검토, 구상하거나 주민 편의나 복지를 위한 행정에는 짬을 내기조차 힘들 수밖에 없다. 많은 시군구의 일선 공무원들은 "단체장의 행사 참여는 하루 5~6건은 보통이고, 10건이 넘을 때가 많아 서류 결재 받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전남의 군 공무원 C씨는 "비서실에서 결재 내용을 전화로 보고하고 군수가 ID 등을 알려줘 대신 전자 결재하도록 하는 일도 있다"고 혀를 찼다. 이 공무원은 "군수가 평일 주말, 주야 가리지 않고 경조사 챙기고 단체여행 떠나는 마을을 찾아 주민들에게 인사하기 바쁘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면서 "선거철이 다가오면 부하 직원에게도 고분고분해 이때만 '갑을' 관계가 바뀐다"고 허탈하게 웃었다.
전남의 한 대학교수는 "주민과 얼굴을 맞대가면서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행정은 자치행정의 기본"이라며 "그러나 행정서비스란 측면보다는 얼굴을 알리기 위해 각종 행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엄청난 행정력 낭비"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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