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정의 선택은 옳았다…‘제2의 김다미’ 아닌 조윤수로 ‘한계’를 뛰어넘다 [인터뷰]
기술자 자경 역 맡은 신예 조윤수
“공감 아닌 동경에서 시작…액션 소화”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단정하게 다문 입술, 하얗다 못해 푸른 흰자위, 살기 가득한 검은 눈동자…. 안개 자욱한 새벽 강가에서 피칠갑이 된 폭군 소녀가 왼쪽 머리에 잿빛이 된 상주 리본을 꽂는다. 그의 눈엔 여전히 감정이 거세됐다.
“박훈정(감독)이 또 어디서 저런 애를 잘도 찾아왔네.” (‘폭군’ 댓글 중)
오디션 기간만 해도 한 달 반. ‘캐릭터 구축’의 장인인 박훈정 감독은 신예 조윤수에게 자신을 증명할 ‘전작’을 요청했다. 영화 ‘마녀’의 뒤를 잇는 ‘박훈정 유니버스’를 완성할 새 얼굴을 낙점하기 위한 절차였다. 일명 ‘기술자’ 자경 캐릭터를 위해서였다.
‘폭군’이 공개되자 ‘박훈정의 선택’에 박수가 나왔다. ‘제2의 김다미’라는 수사가 자연스레 따라왔다. 하지만 그는 제2, 3의 누가 아닌 ‘조윤수’ 그 자체였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윤수(26)는 오디션 당시를 떠올리며 “그날부터 스태프를 모아 3~4일 만에 사이코패스 킬러를 주인공으로 한 7분 짜리 단편물을 만들었다”고 했다. 시나리오도 조윤수가 직접 썼다. 그는 “작품이 다소 미흡해 결국 보여드리진 못했지만, 너무나 자경이가 되고 싶은 마음에 단편물을 만들어보게 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박훈정 감독의 첫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리즈물인 디즈니플러스의 ‘폭군’은 초인 유전자 약물인 ‘폭군 프로그램’의 마지막 샘플이 배달 사고로 사라진 뒤, 그것을 찾기 위한 네 인물의 추격전을 그린다. ‘폭군’엔 독창적이고 강렬한 캐릭터를 입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청소부(차승원 분), 설계자(김선호 분), 추격자(김강우 분), 기술자(조윤수 분) 등이 주축이다.
조윤수는 “‘폭군’의 가장 큰 매력은 한 명의 인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전에는 어떤 일을 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음엔 무엇을 할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크다는 것”이라며 “자연스레 캐릭터에 대해 할 말이 많아진다”고 말했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들이 속속 자리하자 대본은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각각의 장면을 생생히 떠오르게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배우로서도 이런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나는 것은 큰 행운이었어요.”
박 감독이 조윤수를 선택한 것은 그에게서 ‘자경’의 이미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지만, 사실 조윤수의 본체와 자경의 캐릭터는 온도차가 크다. 그는 “캐릭터를 처음 접할 때 공감대를 찾는 것에서 인물 분석을 시작하는데, 처음엔 닮은 점이 너무 없어 힘들었다”고 돌아본다. 함께 작업한 차승원의 이야기가 언급되면 고마운 마음에 눈물부터 뚝뚝 흘릴 만큼 여린 조윤수와 달리 자경은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다. 조윤수가 찾은 해답은 “공감보다는 동경”이었다. 그는 “내가 갖지 못한 면에 대한 동경으로 접근해 푹 빠지게 됐다”는 설명이다.
무엇보다 외적인 모습에서 변화를 시도했다. 평생 긴 생머리를 유지했던 조윤수는 자경을 연기하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머리를 짧게 잘랐다. 대화마다 나오는 다정한 눈빛과 상냥한 말씨도 지웠다.
“처음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을 땐 너무 어색해서 많이 속상했어요. 눈물도 찔끔 날 것 같았고요. 그런 생각이 들던 찰나에 감독님께서 ‘머리가 짧아져 많이 춥니? 너무 잘 어울려서 놀랐다’는 문자를 보내주셔서 모든 설움이 싹 날아가더라고요. (웃음)”
조윤수의 동경과 애정이 담긴 자경은 이중인격 캐릭터다. 매사에 무덤덤한 자경과 늘 의욕적인 자경의 오빠가 한 몸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두 인물은 완전히 ‘상반된 성격’이 아닌 ‘대동소이한 성격’으로 설정됐다. 조윤수는 “자경이가 흐린 눈의 광인이라면 자경의 오빠는 뭐든지 즐거운 사람”이라며 “두 인물이 교차될 때 전조 증상이 없는 것으로 설정돼 목소리의 톤과 어미 처리 등의 디테일한 부분을 고심해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추격 스릴러’물의 생명인 ‘액션’의 상당 부분은 조윤수가 책임진다. 기술자 자경은 ‘폭군 프로그램’ 탈취를 의뢰받아 ‘온몸 액션’을 선보인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조윤수는 오디션 직후 킥복싱부터 배웠다. 그는 “무용을 전공해 몸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한국무용과 액션은 발산하는 에너지의 방향이 달라 쉽지 만은 않았다”고 돌아봤다.
촬영 내내 차승원·김강우·김선호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은 조윤수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롤모델이었다. 조윤수는 세 사람에 대해 “함께 할 때 늘 즐겁고 연기 조언을 많이 해주는 차승원 선배님은 삼촌이자 선생님, 늘 세심하게 챙겨주는 김강우 선배님은 아빠 같은 존재,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응원 한 마디를 덧붙여주는 김선호 선배님은 오빠 같은 선배”라고 했다. 그는 “세 선배님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챙겨주셔서 무너지지 않고 자경이를 끝까지 끌고 갈 수 있었다”고 했다.
2019년 웹드라마 ‘치즈필름’으로 데뷔, 생애 첫 연기에 도전했으나 첫 주연을 맡기까진 5년의 시간이 걸렸다. 대학 땐 승무원의 꿈을 꿨지만, 그의 인생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으로 흘렀다. OCN 드라마 ‘손 더 게스트’(2018)를 본 뒤 배우의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꿈이라기 보단 다양한 인물을 살아보고 싶다는 무모하고 어린 생각으로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며 “조윤수의 인생에선 있을 수 없는 일들을 겪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차곡차곡 필모그라피를 쌓아가던 중 만난 ‘폭군’은 조윤수에게 배우라는 직업의 무게를 알려줬다. 가장 완벽한 ‘한 신(scene)’을 만들기 위해 수십 그릇의 짜장면을 먹고, 수십 대의 담배를 태웠다. 그는 “하나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많은 반복과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줄 몰랐다”며 “이토록 간절히 원하며 작업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한계를 뛰어넘는 작업이었다”고 돌아봤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한 단계 한 단계 넘어서며 오늘의 ‘폭군’을 완성한 것이다.
“데뷔 초엔 그저 잘 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고, 한편으론 부끄럽지만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부단한 노력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연기가 나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선배님들과 ‘폭군’ 작업을 하면서 잘 하는 배우가 되기 위해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알게 됐어요. 열심히 하고 잘 하는 배우가 되는 것이 저의 목표가 됐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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