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 뜬 오바마 부부... 16년 만에 다시 “예스 쉬 캔”
해리스 지지 호소 “지금 미국이 필요한 사람”
유려한 연설에 기립박수와 환호성 쏟아져
20년 전 해리스가 오바마 돕고 지지한 인연
오바마, 16년 전 전설의 선거 슬로건 소환
“나랑 한 집에 같이 사는 남자를 소개하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 사람은 요즘도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나라 걱정을 하는 사람이에요.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입니다!”
20일 일리노이주(州) 시카고의 유나이티드 센터. 민주당 전당대회 이틀째인 이날 미셸 오바마 여사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지지를 호소하는 20분 연설을 한 뒤 마지막 연사를 소개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무대에 올라 “안녕, 시카고!”라고 외치자 현장에선 5분 가까이 기립 박수와 함께 함성이 쏟아졌다. 오바마는 “미국은 지금 새로운 챔피언,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해리스는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싸워 온 사람이고, 당신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달려가 도울 이웃”이라며 해리스 지지를 호소했다. 이어 “예스 쉬 캔(Yes, She Can·그녀는 할 수 있다)”이라 외쳤는데, 이는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 신드롬’을 낳고 사상 첫 흑인 대통령을 만든 전설적인 선거 슬로건 ‘예스 위 캔(Yes, We Can)’을 16년 만에 재소환한 것이다. 부부는 이렇게 사상 첫 ‘흑인 여성 대통령’에 도전하는 해리스의 내일을 응원했다.
해리스와 오바마의 인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샌프란시스코 검사장으로 있던 해리스가 ‘상원의원 오바마’가 캘리포니아에서 주최한 선거자금 모금 행사를 도와준 것이 시작이다. 뉴욕타임스(NYT)는 “흑인 정치인, 혼혈 가정 출신, 부모의 이혼 경험, 법학 공부 등 공통점이 많은 두 사람이 서로에 의지하면서 빠르게 가까워졌다”며 “이후 끈끈한 동지적 관계를 이어왔다”고 했다. 해리스는 2008년 대선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대세론 속 오바마를 지지했다. 이런 해리스의 혜안은 적중했고, 20년이 지난 지금은 오바마가 보답할 때가 됐다. 지난달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포기한 뒤 해리스는 오바마 부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고, 이번 선거 캠프에 오바마를 두 번이나 당선시킨 잔뼈 굵은 보좌진들이 대거 합류한 상태다.
◇ 오바마, 녹슬지 않은 연설… “미국이 제 역할했을 때 세상이 더 밝아져”
퇴임 후 8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녹슬지 않은 연설 실력을 과시했다. 오바마는 “누가 나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싸울 것인지를 생각해보라”며 “트럼프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을 희생하지 않을 것이란 점은 자명하다”고 했다. 이어 “이 78세 억만장자는 늘 본인의 문제를 갖고 징징거린다”며 “특히 유세 규모를 놓고 아주 이상한(weird) 강박 관념이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이는 최근 트럼프가 약 1만명 이상 운집한 해리스의 유세 규모를 놓고 “인공지능(AI)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 거짓말을 한 사실을 꼬집은 것이다. 오바마는 “트럼프는 오로지 본인의 이해와 부자 친구들을 위해 대통령직을 이용하려하고 세상을 제로섬(zero-sum)으로 보는 사람”이라며 “이웃으론 괜찮을지 몰라도 대통령으로는 위험하다”고 했다. “더 이상 허둥대고 혼란스러운 4년이 필요하지 않다” “이미 우리는 그 영화를 봤고, 보통 영화는 속편이 나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고도 했다.
오바마는 이날 “그 어떤 나라도 미국과 같이 크고 다양한 민주주의를 이룩하지 못했다”며 “우리가 세상의 모든 부정의를 소탕하는 경찰이 될 수는 없지만 미국은 충돌을 방지하고, 인권을 촉진하고, 전염병과 싸우고, 자유를 보호하고, 기후변화에 맞서 싸우는 선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받들 때 세상은 더 밝아졌고, 그러지 못했을 때 세상이 어두워져 독재자들이 기고만장해졌다”고도 했다. 오바마는 “돈, 명예, 지위, 좋아요 같이 영속성이 없는 것들에 프리미엄(가치)을 부과하는 시대에 순진한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진짜 중요한 건 정직함, 진실성, 친절함, 노력 같은 것들”이라며 “해리스는 이런 걸 중시하는 캠페인을 구사하고 또 그런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오바마는 지난달 재선 도전을 포기한 조 바이든 대통령을 ‘나의 형제이자 친구’라고 표현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위기인 순간에 바이든이 미국이 진정으로 필요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줬다”며 “16년 전 그를 내 러닝 메이트로 선택한 것이 인생에서 최고의 결정인 것이 입증됐다”고 했다. 해리스의 러닝 메이트인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를 놓고는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며 “시골에서 태어나 아이들을 키우고 풋볼 코치를 하며 현장에서 부대낀 이런 사람이 정치권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서부 ‘시골 아저씨’ 감성이 강점인 월즈 소박한 패션 스타일을 언급하며 “그가 입은 플라넬 셔츠는 정치 컨설턴트가 추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옷장에서 꺼낸 것임이 분명하다”고 농담을 했는데, 이때 행사장 내 카메라가 월즈의 배우자 그웬을 비췄다. 그웬이 맞장구를 치며 수긍하는듯한 모습에 장내에 큰 웃음이 쏟아졌다.
◇ 미셸, 여전한 인기 확인… 연설 내내 환호 쏟아져 “뭐라도 하자”
미셸은 오바마가 대선 후보로 지명된 2008년 이후 4년마다 전당대회 무대에 올라 연설을 하고 있다. 2016년 필라델피아 전당대회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때리며 “그들이 저급하게 갈 때,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When they go low, We go high)” 지금까지 회자되는 명언으로 남아 있다. 미셸은 이날 연설에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노력을 통해 좋은 학교에 가고 변호사, 상원의원, 부통령으로 거듭나 대통령까지 노리는 해리스의 이야기는 바로 여러분의 이야기”라며 “해리스는 필요 이상으로 준비가 돼 있고 그동안 대선에 도전한 후보들 중 가장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가장 위엄이 있으며 나의 엄마, 여러분의 엄마, 우리의 엄마에게 최선을 다해 헌신을 다할 사람”이라 했다.
미셸은 이날 트럼프와도 각을 세웠다. “지난 수년 동안 사람들이 우리를 무서워하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며 “세계에 대한 편협하고 좁은 시각을 갖고 있는 그에게 대통령직이 그저 하나의 ‘흑인의 직업(Black Job)’이라는 걸 알려주자”고 했다. ‘흑인의 직업’이란 말은 트럼프가 지난달 흑인언론인협회 주최 행사에서 언급해 인종 차별 논란이 일었고, 많은 흑인 유권자들의 공분을 샀던 발언이다. 미셸은 “트럼프는 앞으로 해리스가 하는 모든 언행을 깎아내리고 조롱하고 망신을 주고 괴롭힐 것”이라며 “모든 게 다 입맛에 맞아야 한다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우리가 해리스를 보호해 주자. 불평만 하지말고 우리 뭐라도 하자!”라고 했다.
미셸의 이런 발언에 플로어의 대의원과 당원, 지지자들이 “뭐라도 하자(do something)!”라고 반복해서 외쳤다. 미셸은 “이번 대선은 아주 박빙의 승부가 될 것이고 불과 몇 표 차이로 승패가 갈릴 수도 있다”며 “아무런 의심 없이 꼭 투표하라. 우리의 운명이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다”고 했다. 연설 내내 우레와 같은 기립 박수를 받으며 인기를 재확인한 미셸은 “무언가 마법 같은 일이 이 안에서 벌어지고 있고, 밝은 내일을 알리는 희망(Hope)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분열을 조장하는 악마들을 물리치고 다시 돌아오는 미국을 맞자”고 했다. 이날 미셸이 언급한 ‘희망’이란 단어도 오바마가 사상 첫 흑인 대통령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반복해 사용했던 말이다.
◇ 시카고 “오바마 부부는 우리가 키웠다”
시카고의 로펌에서 동료로 만나 1992년 10월 결혼한 두 부부에게 이 도시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오바마는 컬럼비아대를 졸업한 후 시카고에서 처음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에도 뉴욕 등지의 대형 로펌들이 스카우트 제의를 했지만, 이를 뿌리치고 시민 운동을 하기 위해 시카고로 돌아왔다. 정계 입문을 결심한 오바마는 1997년부터 시카고가 속한 일리노이주에서 주(州) 상원의원을 지냈다. 2004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고 4년 만에 헌정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됐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전당대회 현장에서 만난 대의원과 당원들은 오바마 이름이 나올 때마다 크게 환호했고 “오바마는 시카고가 키웠다”고 입을 모았다.
미셸은 진짜 고향이 시카고다. 1964년 한 아프리카계 흑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시의 상수도 펌프 운용 기사로 일하며 민주당 지역구의 지구당 담당자를 지냈다. 시카고에서 가장 뛰어난 공립학교인 휘트니 영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프린스턴대,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했다. 로스쿨 졸업 후 시카고의 ‘시들리 오스틴’ 로펌에서 일했는데, 이때 여름 인턴으로 들어온 오바마를 만나 결혼했다. 이 로펌의 흑인 변호사는 미셸과 오바마뿐이었다. 미셸은 오바마가 정계에 투신한 이후에도 2008년 대선에 뛰어들기 직전까지 시카고 시청, 시카고대 부속 병원 등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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