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산소호흡기 달고 靑 찾아가 ‘IMF 위기’ 경고

이용권 기자 2024. 8. 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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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위복 리더쉽’ 최종현에 묻다 - <上> ‘일등 국가’ 위한 뚝심
이틀간 YS에 “비상조치” 호소
무시했던 정부 결국 ‘외환위기’
3차례 전경련 이끌며 경제 지원
잘못된 정책엔 주저 없이 비판
병상서도 “국가발전에 이바지”
폐암으로 별세… 화장 문화 선도
폐암 수술을 받은 최종현(오른쪽) SK그룹 선대회장이 1997년 9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서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당시 전경련 차기회장인 김우중(왼쪽) 대우그룹 초대회장과 경제위기 극복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 제공
그래픽=하안송 기자

‘일등 국가를 위해서라면 대통령에게 고언도 마다하지 않겠다.’

21일 재계에 따르면 1997년 10월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의 오찬자리에 산소통과 산소호흡기를 달고 갔다. 당시는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후 수술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정이 필수인 시기였지만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으로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경제를 위해 대통령을 만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최 선대회장은 김 대통령에게 외환과 환율, 은행이자율에 관해 특단의 조치를 요구했다. “비상조치를 더 이상 늦췄다가는 큰일 난다”고도 호소했다. 최 선대회장은 그 다음 달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한번 대통령을 만났지만, 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한국에 대한 IMF 긴급자금 지원 내용을 담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폐암 말기 환자가 산소통까지 메고 청와대를 찾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마지막을 힘들게 보낸 병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가정이나 회사는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는 궤도에 있습니다. 이제 여생을 국가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에 바치고 싶습니다.”

IMF 사태 이전부터 최 선대회장은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국익을 먼저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하면 대통령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전경련 회장을 세 차례나 연임하면서, 한국 경제 전체를 걱정하고 재계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일등 국가를 만드는 데 걸림돌이 되는 정책에 대해선 민감한 내용이라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그는 1993년 전경련 회장으로 선출되기 전부터 ‘경제계가 바라는 새 정부의 국가경영’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작은 정부’와 ‘자유경제체제의 확립’을 강조했다. 그는 철저한 시장주의자였다. 시장의 자율성을 저해하는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뒤엔 더욱 거침없이 정부를 향해 의견을 냈다. 정부의 ‘신경제 5개년 계획’에 대해선 시장경제에 대한 의지 부족을 지적하고, 경제5단체 명의로 대기업에 대한 여신규제완화 등을 요구하는 ‘신경제 건의안’을 제출했다.

최 선대회장은 1995년 전경련 회장에 재선임된 후에도 정부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부는 당시 소유분산을 통해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고 대기업 집단 기획조정실을 해체하는 내용의 경제계획안을 발표한 시기였다. 최 선대회장은 “업종 전문화니 하는 것들은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 때나 하는 이야기”라며 “지금은 국경 없는 무한 경쟁시대를 맞아 세계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 선대회장은 정부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공정한 경쟁 환경을 만드는 데 역점을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였지만, 관치가 판을 치는 당시에는 누구도 감히 정부에 직언을 하지 못하던 시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매우 파격적인 행보였다.

정부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최 선대회장은 1998년 8월 26일 자택서 폐암으로 별세했다. 유언에 따라 벽제화장터에서 화장(火葬)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이 역시 사회적으로 파장효과가 컸다. 당시엔 대중 사이에서 화장이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나 국내 굴지 대기업을 이끌던 최 선대회장의 선택이 화장 대중화를 이끌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이 1996년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해 토론하는 모습. 자료사진

최 선대회장, 反시장 등 경제정책에 ‘바른 소리’… YS정부, 가혹한 보복

세무조사 사흘 뒤 공정위 조사
특혜는커녕 사업방해 등 압박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이 일등 국가를 위해 정부에 제안한 바른 소리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특혜가 아니라 보복으로 돌아왔다.

21일 재계에 따르면 1993년 최 선대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에 취임한 뒤 당시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면서부터 정권의 보복은 줄곧 그를 괴롭혔다. 1993년 4월 최 선대회장이 정부의 신경제 5개년계획에 대해 비판하자, 정부는 5월 8일로 예정됐던 경제장관 및 경제5단체장과의 회동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또 5월 17일 ‘신경제 100일 계획 중간점검회의’에서도 전경련 회장인 최 선대회장을 배제했다. 경제를 논의하는 회의에서 전경련 회장을 제외한 것을 두고 당시 세간에서는 경고성 배제라는 평가를 내렸다. 정부의 실력 행사는 최 선대회장이 1995년 전경련 회장에 재선임된 뒤 반시장·반기업 등의 경제정책에 대해 비판하면서 본격화됐다. 최 선대회장의 경제정책 비판 기자회견 이틀 후 국세청이 SK그룹에 대한 세무조사에 들어갔고, 사흘 뒤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부당 내부거래 조사에 착수했다.

결국 최 선대회장은 홍재형 부총리를 만나 정부에 대항하는 것으로 보여진 것에 대해 사과 해야 했고, 기자회견을 열고 거듭 해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민정부는 세무조사를 멈추지 않았다.

재계는 이 같은 정부의 압박이 최 선대회장을 사망하게 한 폐암의 발병 원인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 선대회장이 폐암 진단을 받은 것은 정부의 SK그룹에 대한 압박이 본격화된 이후다. 제6공화국 시절에는 사돈 관계였던 노태우 대통령마저 선경의 사업을 방해하면서 10년 이상 준비한 통신사업이 좌초를 맞기도 했었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 압박을 받았던 SK그룹과 폐암으로 생을 마감한 최 선대회장의 고된 행보를 보면, 일각에서 제기하는 재벌 특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용권 기자 freeus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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