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음과 싸우며 예술을 본다… ‘타르콥스키’에 꽂히는 MZ
3차 세계대전 따른 종말 위기속
일상 회복을 기도하는 주인공
심오하면서 진지한 예술 끝판왕
평론가들조차 “잠들었다” 고백
SNS에 취향·안목 드러내고픈
2030 중심으로 입소문 타는 중
“이 영화는 보기 쉽지 않고, 오래 앉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 어떤 기쁨이 빛납니다.”(미국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
평론가들조차 졸음을 이기지 못해 ‘드르렁’ 해버렸다고 고백하는 예술영화 한 편이 21일 개봉한다. 그런데 위대한 감독의 최고작이자 인류사 가장 훌륭한 영화 중 하나라고 입을 모은다. 러시아의 영상시인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마지막 작품 ‘희생’이 그 주인공이다.
◇위대한 영상시인의 예술영화 끝판왕
‘희생’은 타르콥스키 감독의 예술혼이 응축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들 고센과 섬에 사는 전직 언론인 알렉산더(에를란드 요셉손)의 생일을 맞아 전 아내와 친구가 찾아온다. 그런데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종말의 위기 앞에서 알렉산더는 기도한다. “다른 사람들이 일상을 회복할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알렉산더는 계시를 받고, 자신이 희생해야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예술은 ‘가장 이타적인 인간의 노력’이며 ‘기도’라고 했던 감독의 예술관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영화의 오프닝과 마지막에 쓰인 바흐 ‘마태수난곡’ 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희생과 구원이라는 영화의 철학을 뒷받침한다. 여기에 타르콥스키 특유의 롱테이크가 자주 쓰였다. 집 전체가 불타는 6분 25초의 롱테이크 장면은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심오한 작품 세계로 ‘성인’이라고까지 불리는 타르콥스키의 모든 것을 쏟아낸 이른바 예술영화 끝판왕이다.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겉모습은 고와졌지만, 영화의 내용과 형식은 그대로다. 특유의 느린 호흡에 수없이 멍 때릴 수 있단 얘기다. 그럼에도 개봉 당일인 21일 독립·예술영화 예매율 1위이고, SNS에 꾸준히 기대하는 글이 올라온다. 뭐든 10분을 못 버티고 넘겨버리는 쇼츠 시대에 인내심을 요구하는 진지한 영화가 관심받는 이유는 뭘까.
◇실패가 두려운 요즘 관객들 검증된 훌륭함 찾아
‘희생’은 배급사 엣나인필름에서 서슴없이 ‘이 시대 최고의 걸작’이라고 홍보할 정도로 영화사적으로 검증된 작품이다. “영화를 예술로 부를 수 있다면, 그건 타르콥스키 같은 감독 덕분일 것”(잉마르 베리만), “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기적으로서의 영화 체험”(장뤼크 고다르) 등 대가들의 칭송이 넘쳐난다.
한국 평론가들 역시 힘을 싣고 있다. 특히 이동진·정성일 등 다수의 팬을 보유한 영화평론가들의 호평은 예술영화계에선 강력한 입소문으로 작용한다. 정성일은 타르콥스키의 오랜 지지자이고, “타르콥스키는 첫사랑 같은 인물”이라는 이동진은 오는 24·25일 CGV 21개 관에서 영화 관람 후 해설을 진행하는 ‘언택트톡’을 연다.
이는 검증된 작품만 골라 맛보려는 관객들의 입맛과 궤를 같이한다. 영화 자체보다 영화를 ‘보러 가는’ 행위에 보다 의미를 두는 현상도 목격된다. 관객 수 20만 명을 넘기며 흥행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경우 영화 관람 인증 릴레이가 벌어졌다. ‘키메라’ ‘태풍클럽’ 등을 수입한 임동영 엠엔엠인터내셔널 대표는 “요즘 관객들은 실패를 피하고자 안정 지향적으로 영화를 고른다”며 “영화가 이해되지 않더라도 이미 평가가 끝난 작품이라면 기꺼이 시간과 돈을 지불한다”고 짚었다.
‘희생’ 외에도 이미 검증을 마친 훌륭한 영화들이 국내 관객을 속속 찾는다. 폴란드 감독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3부작은 9월에 개봉한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독립시대’도 9월에 만날 수 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10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2월)도 올해 국내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입소문에 민감한 20대가 주도
‘희생’은 과거에도 국내에서 많이 봤다. 1995년 2월 25일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11만 관객을 동원했다. 해외에서 한국 영화광들에 대한 기사가 나왔을 정도. 흥미로운 건 흥행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20대에서 ‘희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는 점이다. 20일 CGV에 따르면 ‘희생’의 예매 비중은 20대가 32%로 가장 높다. CGV가 진행했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전 역시 20대 비율이 40%에 달했다. 수입사 역시 20·30대를 중심에 두고 입소문을 겨냥한 마케팅을 진행한다.
20대가 예술영화, 특히 검증된 재개봉 영화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이 영화들을 극장에서 처음 만나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들어만 봤던 영화들을 직접 체험하고, 고전을 정립하는 기회란 얘기다. 공연·전시회 관람처럼 SNS에 자신의 취향과 안목을 남부끄럽지 않게 드러내는 적당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시각도 있다.
문제는 검증된 작품에 입소문이 더해진 재개봉 예술영화가 선전할수록 신작 독립·예술영화는 힘겨운 싸움을 펼쳐야 한다는 점이다. 임 대표는 “가진 자에게 더 몰리는 빈익빈 부익부 공식은 상업영화에만 적용되지 않는다”며 “당장 예술영화가 관심을 받는 것은 반갑지만, 장기적으로 올바른 방향인가에 대해선 업계 내부적으로 고민이 있다”고 전했다.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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