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주 태아의 죽음, 임신 중단에 대한 두 가지 시선 [스프]

조동찬 의학전문기자 2024. 8. 2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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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조동찬] 법의 공백에 놓인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권익

첫 번째 시선

20여 년 전 의대 졸업생 환송회였다. 의사 첫걸음을 내딛는 주인공들을 축하하기 위해 졸업한 선배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1차 장소에서는 유난히 말이 없던 한 산부인과 전문의 선배가 2차 감자탕집에서 소주를 연거푸 들이켠 후 '더는 못 하겠다'는 말을 꺼낸다. 그는 고해성사하듯 말을 이어갔다.

"분만만으로는 병원을 유지하기 힘들어. 병원을 유지하려면 임신 중단(당시에는 낙태라고 했다) 수술은 필수야. 나야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받으면 엄한 데서 받는 것보다 임신부가 안전할 테니까. 지난번 임신 중단 수술도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어. 초음파를 보며 11주 된 태아를 꺼내려고 하는데, 그 녀석이 그 도구를 피하는 것 같은 거야. 아니 분명히 회피 반응이었어. 그 순간 내가 뭘 하는 것일까? 살려고 발버둥 치는 생명을 기어이 쫓아가 끄집어내는 일을 바로 내가 했던 거야."
 

두 번째 시선

10여 년 전 낙태죄에 관해 취재하느라 산부인과 전문의를 만났다. 그는 다소 격양된 어조로 '낙태죄'라는 굴레 때문에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있는 게 대한민국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한 번은 임신 12주 된 20대 여성이 낙태를 원한다고 찾아왔어요. 혼자 왔길래 섣부르게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조금 더 상의한 후에 다시 오라고 말했죠. 그런데 그 임신부가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불법 낙태 시술자에게 찾아갔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어요. 그 임신부의 죽음에 제 책임이 없을까요? 저는 태아의 생명을 구하지도 못하면서 임신부의 생명까지 잃게 한 것 같아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어요. 그 친구가 낙태를 선택한 건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모든 책임을 본인이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예요. 혼자서 출산, 육아 등 모든 걸 감당하는 건 태아나 여성 자신에게 더 불행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그게 맞잖아요. 그런 친구에게 알량한 생명 존중 사상이나 강조하는 게 현실적인가요?"
 

왜 36주 태아의 숨지는 과정을 영상으로 제작했을까?


한 유튜버가 36주 만삭인 상태에서 임신 중절 수술을 하는 과정을 브이로그 영상으로 올렸다. 영상 속 초음파를 보면 태아 머리의 직경은 8.89cm였고 심장 소리도 들렸다. 관심을 끌기 위한 거짓으로 생각했지만 경찰 조사 결과 사실로 확인됐다.

이 뉴스를 접하며 강한 궁금증이 생겼다. 영상 속에는 산부인과 전문의가 영상 찍는 것을 거부하는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살인죄로 기소하겠다는 입장인데, 자신의 병원이 살인죄의 현장으로 카메라에 찍히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건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임신 중절하는 의사 사이에는 사실상 낙태죄가 사라진 것으로 인식된다'고 밝혔다. 그 시점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헌법재판소는 자기낙태죄와 의사 등의 업무상촉탁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모든 낙태를 전면적이고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서 낙태죄를 물을 수 있는 기간을 사회가 합의해서 정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5년 넘도록 관련 법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전염병, 모체 생명 위협 등 다섯 가지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모든 낙태에 죄를 물었던 모자보건법은 사라졌는데, 그 이후 법률이 나오지 않았으니 '사실상 낙태죄가 사라졌다'는 건 팩트였다.

이는 실제 판례에서도 드러난다. 2019년 임신 34주 여성이 낙태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고 의사는 제왕절개로 꺼낸 아기를 태어나자마자 물속에 넣어 질식사시켰다. 경찰은 여성과 의료진 모두에게 적용되는 낙태죄를 묻지 않았고, 의료진만 살인죄로 기소했다. 살인죄로 기소된 것도 태아를 엄마의 몸속에서 꺼낸 후 질식사시킨 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만약 의사가 엄마의 자궁 안에서 태아를 숨지게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수의 변호사는 의료진도 처벌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낙태죄는 사라졌고, 태아가 엄마 몸속에서 숨진다면 어떤 죄도 물을 수 없게 된 것이다. 36주 태아의 낙태 과정이 버젓이 영상으로 제작돼 유포된 데에는 이런 법률적인 공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예상했던 대로 36주 태아의 임신 중절을 집도한 70대 병원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사산된 아이를 꺼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병원 기록부에는 사산한 것으로 표기됐으며, 태아는 화장됐고, CCTV는 현재 없는 상태이다. 이번에도 경찰은 낙태죄가 아닌 살인죄로 기소하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입증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권익

생명을 언제부터 볼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이다. 헌법재판소는 태아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기를 22주 정도로 봤지만, 의학의 발달로 22주 이내에 800g으로 태어난 아기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자유로운 임신 중단 수술의 기간도 나라마다 다르다. 프랑스 12주, 스페인 14주, 뉴질랜드 20주인데 최근 프랑스는 여성의 낙태할 자유를 헌법에 보장하기로 했고 반면 일본은 자유로운 낙태 자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의학계에서는 자유로운 낙태 기간을 10주 이내로 주장하고 있다. 10주 이내면 생명이 아니라고 보는 건 아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 결과 국내 낙태 수술의 90%가 10주 이내에서 이뤄지고 있는데, 이것이라도 양성화시켜 위험한 임신 중단을 막기 위함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조동찬 의학전문기자 dongchar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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