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세계를 구하리라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글집’이 참여하면서 어린이글방의 이야기는 다층적이고 풍요로워졌다. 글집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살면서 어린이글방에 참여하는 열한살 한국인 여자 어린이다. 먼 이국에서 어린이 글방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줌으로 수업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일상을 나누는 시간에 글집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한다.
라마단 기간이라 친구가 점심시간에 도서관에 가.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으려고. 어린이들은 잠시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라마단이 뭐야? 이슬람 사람들이 금식하는 거야. 한달 동안 해가 떠 있는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 어린이들과 노약자들, 병자들은 먹을 수 있어. 와글와글 글방이 시끄러워진다. 물도 안 먹어? 안 먹어. 에이 설마. 몰래 마시겠지. 해가 지면 먹는 거야? 어, 해가 지면 마음껏 먹어. 와, 그럼 밤새 먹으면 되겠네. 글집 너도 안 먹어? 아니, 난 이슬람이 아니니까 먹지. 우리는 코란에 대한 이야기도 듣는다. 위대하신 알라신이여, 하고 코란 읽는 소리가 어디서나 들려. 지니가 코를 후비며 묻는다. 알라신? 어, 이슬람 사람들이 믿는 신이야. 이슬람사원에서도 기도하고 콘도 같은 데 놀러 와서도 기도해. 어린이들은 열심히 질문하고 집중해서 듣는다. 어떤 날 글집은 무심히 이런 이야기를 한다. 오늘은 치파오를 입고 학교에 가는 날이야. 중국 사람들 명절이거든. 폭죽도 엄청 터뜨려서 시끄러워. 어린이들은 또 묻는다. 치파오가 뭐야? 우리나라 한복 같은 건데 중국 사람들이 입는 옷이야. 너도 입어? 나는 빨간색 옷을 입고 갔어. 치파오를 안 입으면 빨간색 옷을 입고 가면 돼. 그런데 인도 친구는 치파오를 입고 왔어. 선생님들도 치파오를 입고 와. 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새삼 새롭게 보인다. 글집은 말레이 사람, 중국 사람, 인도 사람, 프랑스 사람, 튀르키예 사람 사이에서 다양한 문화와 관습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그 이야기를 글방에 가져와 또 다른 이야기꽃을 피워내는 전령사다. 선거날에 엄마를 따라 한국대사관에 투표하러 간 이야기도 재밌었고 다쳐서 어린이 전문 응급실에 간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두 나라의 경계를 오가며 쓰는 글집의 글은 낯설면서 신선하고 독자적이다. 은연중에 어린이글방 친구들의 시야를 확장해준다. 줌으로 수업을 하는 동안 우르르쾅쾅 열대의 스콜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신드바드의 글에는 초등학교 교실의 풍경이 펼쳐진다. 신드바드네 반에는 ‘문제적 친구’가 있다.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그게 안 되면 친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필통도 집어던진다. 하루는 모둠에서 연극을 하는데 주인공 역할을 맡지 못하자 의자를 집어던지며 ‘난동’을 부렸다. 선생님이 이야기를 하다가 안 돼서 그 친구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친구 엄마가 학교에 왔다. 신드바드와 급우들과 선생님은 두 사람을 교실에 남겨두고 운동장으로 나간다. 한참 시간이 흘러 교실로 돌아오자 그 친구가 사과하고 그날 일은 끝난다. 신드바드의 글에 대한 합평 시간에 글방 어린이들은 자신들의 교실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보탠다. 우리 반에서는 어떤 친구가 선생님을 때렸어요. 샤가 말하자 어린이들이 경악하는 표정을 짓는다. 어디를 때려? 배를 때렸어. 그래서 선생님이 울었어. 희재도 말을 보탠다. 우리 반 어떤 애가 선생님한테 욕을 했는데 선생님이 너무 착하셔서 화를 안 냈어. 그런데 그 친구가 자꾸 욕을 해서 선생님이 아프셔서 학교를 쉬시고 다른 선생님이 오셨어. 다른 선생님은 좀 무서워서 우리는 착하신 선생님이 보고 싶었어. 시먀가 덧붙인다. 선생님이 너무 착하시면 안 돼.
교실과 관련한 어린이들의 글과 말을 종합해보면 어린이들은 교실에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과도하게 이기적이거나 선생님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아이들을 엄히 꾸짖고 적당한 벌도 주기를 바란다. 시끄러운 평화와 유연한 질서가 유지되기를, 어린이들은 원하는 듯했다.
위의 글은 교실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다룬다. 위는 최근에 같은 반 친구로부터 폭력을 당했다. 위의 꿈에는 까마귀떼가 어두운 하늘을 날아다닌다. 어른들은 잊어버리라고도 말하고 그 일에 대해 집중하지 말라고도 조언한다. 폭력을 행사한 어린이는 목표를 잃어버린 어린이이니 무시하라고도 말한다. 위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자려고 누우면 자꾸 그 일이 생각난다.
어린이들의 글에는 어린이들의 당사자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들이 원하는 것, 그들이 바라는 세상의 형태가 오롯이 보인다. 어린이들의 글을 읽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어른들의 시선으로 어린이의 세계를 재단하지 않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의 주체로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존경할 수 있게 된다. 어린이들이 약하고 귀엽고 순수한 존재라는 건 어른들이 생산한 혹은 원하는 이미지다. 어린이들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무럭무럭 있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즐거움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마음이 놀랍도록 크다. 어린이들이 가장 열중하는 것은 즐거움을 창조하는 일이다. 어른들의 방식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편협함을 버리고 어린이들의 기준과 바람과 태도를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걸 글방에서 글을 읽을 때마다 깨닫는다.
최근에 어린이들이 소설을 쓰자고 했다. 나는 조금 의외라 소설이 쓰고 싶냐고 되물었더니 다들 신나게 네, 대답을 하고는 엄청나게 집중해서 글을 썼다. 검바는 원고지 스물한장에 이르는 소설을 써서 발표했는데 너무 재밌어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서 들었다. 비밀 임무를 띠고 지구에 온 외계인과 알고 보니 외계 생명체인 우리 집 강아지, 우주무기 브로커인 편의점 알바생과 내 친구 재윤이가 등장하는 이 멋진 글에는 우리의 미래세대가 품고 있는 이야기의 씨앗이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은 ‘기록되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다. 양몽은 ‘2054년 4월’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성으로 이주한 뒤 트럭을 타고 세상의 곳곳을 누비는 줄거리다. 사피엔스가 사라진 지구의 모습은 고요하고 쓸쓸하지만 장관이었다. 트럭의 지붕에 앉아 지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무연히 바라보는 마흔세살 양몽의 모습은 뭉클하고 애틋했다. 와, 나보다 훨씬 잘 썼네요. 진심, 이었다. 이들이 세계를 구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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