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눈엔 모든 게 정쟁으로만 보이나 [미디어 전망대]
이희용 | 언론인
“여야 정쟁 탓에 민생은 뒷전” 언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설 제목이다. 많은 이가 공감하고 개탄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근본 원인을 도외시한 채 현상만 보고 훈수하는 언론의 고질병이자 무책임한 양비론임을 알 수 있다. 언론이 민생 해결에 보탬 되는 기사보다 정쟁을 부추기는 보도를 일삼은 걸 생각하면 사돈 남 말 한다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채수근 상병 부모는 지난해 7월 친필 편지에서 “철저한 원인 규명을 통해 다시는 이같이 비통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썼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간곡히 당부하신 말씀을 묵묵히 실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대통령의 축소 압박과 국방부의 은폐 기도가 속속 드러나는데도 보수 언론 논조는 “해병의 죽음을 정쟁에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지난달 말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 국회 청문회에서는 이 후보가 법인카드 유용 의혹에 아무런 증빙 자료를 제출하지 않고 “업무용으로 썼다”는 말만 반복하는데도 여러 신문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도덕성과 국회를 경시하는 태도를 꾸짖기는커녕 “청문회가 ‘빵문회’로 전락했다”며 야당을 조롱했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사건을 맡았던 국민권익위원회 고위 간부가 지난 8일 스스로 목숨을 끊자 일부 언론은 익명의 권익위 관계자 말을 인용해 “디올백 사건 종결 결정 과정에서 권익위원들이 여야 입장에 따라 갈라져 싸우고 회의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등의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며 정쟁에 화살을 돌렸다. “윗선의 압박 때문에 사건 처리가 잘못돼 괴로워했다”는 주변 증언과는 사뭇 다른 분석이다.
여당과 대통령실은 “안타까운 죽음을 정쟁의 소재로 삼는다”고 개탄하고 “공직사회를 압박해 결과적으로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민주당”이라며 역공을 펼친다. 외교 안보상 중대한 문제가 불거지거나 대통령 부인 비리 의혹이 드러나도 본질을 호도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거듭되고 있다.
당리당략을 따지는 정당뿐 아니라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마저 모든 비판이나 반대를 정치 공세로 여기는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이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 “먹고살기 힘든 국민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라고 했다는 말은 자가당착의 극치다.
그럼에도 일부 언론은 친일 인사들의 명예 회복을 주장하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을 임명한 문제는 젖혀둔 채 “정쟁을 유발하고 국론을 분열시킨다”며 이종찬 광복회장을 공격하고 있다. 이시영 초대 부통령이 1947년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세운 사실이나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광복절에 건국 50주년을 언급한 것 등을 비난의 근거로 든다. 반대되는 증거도 수두룩하다. 제헌국회는 헌법 전문에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천명했고 이승만 정부는 1948년 8월15일을 정부수립일로 기념했다.
건국 개념에 혼선이 있긴 했으나 대한민국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제헌 이후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제외하고 일관된 헌법 정신이자 국민적 합의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도 ‘1945년 8월14일까지 일제의 국권 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자’로 명시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의 생각은 다르다. 독립운동의 목적을 해방과 건국이라고 보고 일제하 해방을 위해 투쟁한 공적이 있다 해도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다면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이 1948년을 건국 기점으로 삼으려는 의도는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고 백선엽, 백낙준 등 친일파를 건국 공로자로 받들겠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홍범도나 이동휘 등 사회주의 계열은 물론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신채호, 무장투쟁론자 박용만과 김구 등 수많은 독립유공자 공적은 묻힌다.
현 정권은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등에도 뉴라이트 인사들을 전진 배치해 헌법과 법률을 부정하고 국민적 합의를 흔들려 한다. 이것이야말로 먹고살기 힘든 국민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어서 언론이 책임을 따지고 철회를 촉구해야 한다. 사안의 본질이나 원인에는 관심 없고 여야 공방만 중계하는 언론의 행태가 지겹다. 사설로는 정쟁하지 말라고 부르짖으면서 기사로는 정쟁을 부추기는 이중플레이가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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