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사만 바꾸면 폭주는 사라질까 [이진순 칼럼]

한겨레 2024. 8. 2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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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고백건대 난 ‘공화주의’에 무지했다. 날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대통령은 줄곧 박정희 한 사람이었던 내 세대에게 ‘공화’는 두렵거나 의미 없는 낱말이었다. 북한이 스스로를 지칭할 때 쓰는 ‘공화국 북반부’는 음습한 공포의 블랙박스였고, 헌정사상 가장 오래 집권한 민주‘공화’당은 독재의 행동부대였다. 최루탄 연기 속에서 ‘독재 타도! 민주 쟁취!’를 외칠 때도, 막걸리 잔 앞에 놓고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부를 때도 민주면 다 되는 줄 알았지, 공화는 몰랐다. 박근혜 탄핵 촛불광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제창할 때에도 공화는 민주의 접미사에 불과했다. 어리석었다.

공화주의 없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공허하고 무력한 것인지 사무치도록 깨닫게 해준 것은 ‘고맙게도’ 윤석열 정부이다. 재임 2년3개월 동안 21번의 거부권을 행사하고, 고작 30%를 넘나드는 지지율로 나머지 70%를 외면하고 ‘반국가 세력’으로 적대하는 제왕적 대통령에겐 국회도 국민도 없다. 22대 총선에서 참패한 뒤에도 오만과 아집은 오히려 단단해져서 막가파식 인사와 전횡으로 ‘이판사판’ 전술을 구사한다.

총선에서 압승한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이재명 단일체제를 공고히 했다. 윤 정부가 파국을 자초하고 있으니 포스트 윤석열의 대안으로 이재명 대권 리더십을 옹위하자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제왕적 대통령을 폐하기 위해 또다른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내세우면 내전과 같은 정치 파행은 마감될까? 기관사만 바꾸면 폭주기관차는 사라질까? 어느 쪽이든 30% 안팎의 고정지지층에 기댄 리더십은 강력한 비호감층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차기 지도자는 차원이 다른 대안을 내놔야 한다. 공화적 가치에 입각해서 무너진 민주주의를 리모델링하는 국가 비전 말이다.

그간 양당의 적대정치를 비판하는 공화주의자들에겐 늘 의심과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흐리멍덩한 중도, 양비론자, 기계적 중립론자, 위선자, 기회주의자, 기껏해야 ‘대화와 타협’ 같은 입바른 소리만 지껄여대면서 달려오는 폭주기관차를 가로막을 아무 대안도 못 내놓는 무능력자들로 취급된다. 이해는 간다. 제3지대를 주창하고 나선 유력정치인들이 중도를 자임하다가 몸값을 불려 양당으로 흡수되는 게 다반사였으니. 공화는 가치와 철학이 없는 중간치가 아니다. 공화주의는 기계적 중립론이나 양비론도 아니다. 때로 양당을 모두 비판하게 되는 건 중립을 표방해서가 아니라, 양당 모두 이권공동체로 특권층의 이익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부자의 세금을 감면하고 그린벨트를 풀고 아파트 용적률을 높이고 그래서 수도권 집중에 비난이 쏟아지면 지방에 공항을 세운다, 항만을 놓는다, 실효성 없는 공약을 늘어놓는 행태는 양당이 도긴개긴이다. 세로로 자르면 좌우로 나뉘지만, 가로로 자르면 상층부에만 알맹이가 몰려 있는 기득권 정치이다. 올해 초에 총선을 앞두고 ‘시사인’에서 실시한 ‘2024 총선 유권자 지형 분석’(2024년 1월3일치)에 따르면 양당 모두에 비호감을 표한 ‘무당파’는 전체 조사 대상자의 48%로, 절반에 육박한다. 이들이 양당을 비판하는 요소는 첫째 ‘실망감을 준다’, 둘째 ‘기득권 세력이다’, 셋째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 넷째 ‘당내 다양한 의견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섯째 ‘강성지지층의 영향력이 크다’ 차례로 나타났다.

더 나은 정치를 위해선 절대권력의 반지를 깨버리고 기관차가 폭주할 수 없도록 안전한 제동장치를 달아야 한다. 그것이 공화정이다. 영산대 장은주 교수에 따르면 공화정이란 ‘공동선에 대한 지향 속에서 사회를 이루는 중심 세력 사이에 권력의 분점과 견제 및 조화가 이루어진 정치 체제’이다. 2024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공화국이 되려면 첫째 모든 생명은 평등하게 존엄하다는 대원칙, 둘째 공동선을 위한 법과 제도에 누구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는 특권 타파의 원칙, 셋째 복수와 혐오의 무한루프를 깨고 다양한 시민이 숙의의 장에서 시민적 덕성을 발휘한다는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아기를 반으로 갈라 나눠 가지면 아기는 죽는다. 이 나라를 되살릴 솔로몬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한때 노사모 대표를 지냈던 노혜경 시인의 경구가 새롭다.

“민주의 반대말이 독재라면, 공화의 반대말은 단연 혐오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단순히 민주주의만 후퇴하는 상황이 아니다. 민주공화국이어야 할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가 망가진 상황이다.”(‘노무현 공화국’의 시민 노사모와 진보의 미래, ‘시민언론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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