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원의 헬스노트] "바람직한 의료전달체계, 2차병원 역할 바로 세워야"

김길원 2024. 8. 21.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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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병원 붕괴로 3차병원 환자쏠림 가속…지역 내 1·2·3차 단계별 환자의뢰체계 필요"
붐비는 응급실 (서울=연합뉴스) 신현우 기자

(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2010년에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는 큰 애를 데리고 강남의 3차 병원(상급종합병원) 응급실에 갔습니다. 결과는 부비동염(축농증)이 원인이었죠. 2020년에는 둘째가 친구들과 놀다가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 역시 집 주변 3차 병원에 데려갔지만, CT 촬영 결과 큰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받고 귀가했습니다. 2022년에는 아버지가 마트에서 뇌출혈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여러 3차 병원의 응급실 문을 두드리고, 온갖 인맥을 다 동원했는데도 당장 치료가 가능한 곳이 없어 1시간 반을 구급차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강남·서초에 2차 병원이 있었고, 1차에서 2차, 3차로 이어지는 의료전달체계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아이들의 경우 굳이 3차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됐고, 아버지는 3차 병원 응급실을 차지하고 있는 경증환자들로 인해 구급차에서 골든타임을 허비하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박진식 세종병원(혜원의료재단) 이사장은 최근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 주최로 서울 중구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열린 미디어아카데미에 나와 전문병원의 의사이자 환자 보호자로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례를 들어 국내 의료전달체계의 문제점을 이같이 지적했다.

심장내과 전문의인 박 이사장은 현재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우리나라의 의료전달체계는 의료기관의 종류(등급)에 따라 통상 1차, 2차, 3차 병원으로 나뉜다.

1차 병원은 병상수 30개 미만으로, 동네 병의원이 이에 해당한다. 2차 병원은 전문병원과 30개 이상의 병상을 가진 종합병원을 아우르며 일부 대학 부속병원도 포함돼 있다.

3차 병원은 희귀·중증질환 등 난도 높은 의료행위를 하는 상급종합병원으로, 보건복지부가 3년 주기로 지정한다. 현재 국내 상급종합병원은 총 47곳이다.

환자는 1차나 2차 병원 어디든 선택해 갈 수 있으며, 3차 병원만 1차 또는 2차 병원의 진료의뢰서가 있어야 진료가 가능하다. 환자 입장에서 보자면, 3차 병원을 제외하고는 1차와 2차 병원은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셈이다.

박 이사장은 바람직한 의료전달체계를 만드는 3가지 축(아이언 트라이앵글 헬스케어)으로 '의료의 질, 비용, 의료 접근성' 3가지를 제시했다. 얼마나 좋은 수준의 의료를 얼마나 쉽게 이용할 수 있고, 얼마나 비용 부담이 덜한지가 의료전달체계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시스템은 허리 격인 2차 병원의 역할이 무너진 지 오래고, 1차 병원에서 2차 병원, 3차 병원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의료전달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경증 환자들의 3차 병원 쏠림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게 박 이사장의 진단이다.

그는 "한국은 그동안의 급속한 경제발전 덕분으로 의료의 질, 비용, 접근성이 모두 잘 갖춰져 있었지만, 이제 초고령화로 접어들면서 의료 이용량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시기에도 이런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대형병원으로 경증 환자들이 쏠리는 이유 중 하나로 2차 진료를 건너뛴 채 지역의 제한 없이 1차에서 곧장 3차로 보낼 수 있게 만들어진 현 의료전달체계의 모순을 꼽았다.

박 이사장은 "의료전달체계를 1차, 2차, 3차로 나눈 건 1차 의료는 처음 가는 곳, 2차 의료는 한 단계의 의뢰를 거쳐서 가는 곳, 3차 의료는 두 단계의 의뢰를 거쳐서 가는 곳이라는 의미인데도, 우리나라는 최상위 병원인 3차 의료기관이 두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서 2차 병원의 역할이 크게 약화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대형 상급종합병원들이 몸집을 키우는 과정에서 처음에 기대했던 것만큼 중증 환자의 비율이 늘어나지 않자 결국 2차 병원에서 돌봐야 할 중등증(경증과 중증 사이) 환자 진료를 시작한 것도 2차 병원의 역할이 잠식당하는 문제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박진식 세종병원 이사장이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 미디어아카데미에서 발표하고 있다.[촬영 김길원]

따라서 3차 병원에 환자가 쏠리는 의료전달체계를 바로잡으려면 지역 내 2차 병원의 역할을 강화하고, 상급종합병원에 진료 수가를 더 주는 오랜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박 이사장은 주장했다.

그는 "오랫동안 상급종합병원을 기준으로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진료 수가를 더 주다 보니 상대적으로 시설·인력·장비가 열악한 1차, 2차 병원이 낮은 점수를 받아 신뢰가 하락하는 악순환이 수십년간 반복됐다"면서 "지역 내에서 1차, 2차, 3차 순으로 환자가 의뢰되고, 정부에서도 각 의료기관의 역할과 기능 중심으로 평가·보상을 해야만 무너진 의료전달체계가 바로 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도 의료전달체계 개선을 위해 2차 병원의 역할 재정립을 추진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의료개혁 추진 상황 브리핑에서 향후 3년에 걸쳐 상급종합병원의 중증진료 비중을 현재 50% 수준에서 60%로 올리고, 중등증 환자들이 믿고 찾을 수 있는 지역 진료 협력병원을 키우겠다고 밝혔다.

상급종합병원의 비중증 환자 진료를 줄이는 대신 2차 병원에 해당하는 진료 협력병원과 의뢰·회송 등의 협력체계를 강화함으로써 의료전달체계를 개선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다만, 이처럼 2차 병원의 역할이 재정립되려면 먼저 정부가 추진 중인 상급종합병원의 진료 감축 추이를 봐야 하고, 1차 병원과 2차 병원을 명확히 구분하는 기준 마련도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한병원협회 관계자는 "지금 우리나라의 의료전달체계에서 1차와 2차 병원은 환자들 입장에서 구분이 힘들 만큼 혼재된 상황"이라며 "앞으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묵은 논란이 있겠지만, 1차와 2차 병원을 구분할 때 전문의 진료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환자들이 상급종합병원만 바라보는 인식도 개선돼야 할 부분이다.

간질환 환자 모임인 간사랑동우회 윤구현 대표는 "환자 입장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2차 병원은 의료전달체계 내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는 게 사실"이라며 "앞으로 2차 병원이 지역 내에서 1차 병원과 구별되는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고 환자들도 1차, 2차 병원 진료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면 굳이 3차 병원이나 서울의 빅5 병원을 고집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bi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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