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혈한’ 된 조선인 재일사업가식민시대 잔혹한 민낯 드러내[선넘는 콘텐츠]

이호재 기자 2024. 8. 21. 03:0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1945년 일본 오사카의 한 고급 음식점.

일본 정치인들이 조선 출신 사업가 한수(이민호) 앞에서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다.

조선에 은근한 애정을 품고 있는 한수는 겉으론 일본인처럼 행세하지만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조선인을 돕다가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고문당한 이삭과 살아남기 위해 같은 조선인을 착취하는 한수의 뚜렷한 대비는 일제강점기라는 잔혹한 시대가 당시 사람들을 여러 선택의 기로로 내몰았음을 보여준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3> 드라마 ‘파친코2’ 원작 비교
소설서 고국에 애정 많았던 한수, 드라마선 조선인 착취 악인으로
善 택한 캐릭터들과의 대비 뚜렷
원작선 과거 못 벗어난 ‘늙은 선자’…현재를 열심히 사는 할머니로 그려
韓 이민자의 영원한 방황 포착
드라마 ‘파친코’ 시즌2에서 한수(이민호)는 살아남기 위해 같은 조선인을 착취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배우 이민호는 2022년 시즌1 공개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한수는 처절했던 시대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앞만 바라보는 거친 인물”이라며 “절대 선이었던 사람이 생존의 과정에서 절대 악으로 살게 되는 과정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애플TV플러스 제공
“식민지(조선)에는 쌀이 남아도는데, 본토(일본)로 운반해오기 힘들죠? 조선인이 등에 쌀을 지고 헤엄쳐 오게 하면 어떨까요?”

1945년 일본 오사카의 한 고급 음식점. 일본 정치인들이 조선 출신 사업가 한수(이민호) 앞에서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다. 한수가 일본 정치인들에게 상납의 대가를 요구하자 한수의 출신을 우회적으로 거론하며 악의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하지만 한수는 화내지 않는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한수에게 치욕은 살아남기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다.

23일부터 매주 1편씩 공개되는 애플TV플러스 8부작 드라마 ‘파친코’ 시즌2는 일제강점기 고국을 떠나 일본과 미국에서 정착한 한인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2022년 처음 공개된 뒤 미국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TV 부문 최우수 외국어 드라마상을 받는 등 화제가 됐다. 시즌1이 젊은 선자(김민하)의 시점에서 주로 진행됐다면 시즌2는 한수를 내세우며 서사를 펼친다.

시즌2에서 한수는 냉혈한으로 묘사된다. 어릴 적 제주에서 일본으로 넘어온 한수는 1923년 간토대지진을 겪으면서 살아남았고, 생존을 위해 냉혹하게 남을 착취하는 인물로 자란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같은 조선인도 돕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며 자신의 숨겨진 아들 노아(박재준)를 몰아붙이기도 한다.

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이 쓴 동명의 원작소설(사진)에서는 한수의 캐릭터가 조금 다르게 그려진다. 조선에 은근한 애정을 품고 있는 한수는 겉으론 일본인처럼 행세하지만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노아에게도 너그럽고 자애로운 아버지다. 소설 속 한수는 와세다대에 진학하게 된 노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조선인들을 위해서, 와세다대 같은 학교에 갈 수 없는 모든 조선인들을 위해 배워라.”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게 된 한수는 조선인 목사 이삭(노상현)과 대척점에 있다. 이삭은 한수의 아이를 임신한 뒤 버림받은 젊은 선자와 결혼하고 한수의 아들인 노아를 친자식처럼 키운다. 조선인을 돕다가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고문당한 이삭과 살아남기 위해 같은 조선인을 착취하는 한수의 뚜렷한 대비는 일제강점기라는 잔혹한 시대가 당시 사람들을 여러 선택의 기로로 내몰았음을 보여준다.

나이 든 선자 역할을 맡은 배우 윤여정. 애플TV플러스 제공
소설에서 1989년 일본에서 살아가는 나이 든 선자(윤여정)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인물로 표현된다. 틈만 나면 자식들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옛 시절을 회상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이삭의 묘지에 찾아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냐”며 자식들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반면 드라마에서 선자는 극 중 현재(1989년)를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인물로 묘사된다. 도쿄에 사는 손자인 솔로몬(진하)의 집에 벌컥 찾아가 갈비찜을 해주는 등 뒷바라지를 한다. 미국 유명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방황하는 솔로몬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돈을 빌려주기도 한다. 솔로몬에게 “네가 누군지 잊지 마라”며 조선인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드라마가 선자의 현재를 비추는 건 고향을 떠나온 ‘이방인’의 영원한 방황을 그리기 위해서다. 1989년을 살아가는 선자는 돈을 많이 번 조선인이지만 일본어를 잘하지 못한다. 조선인을 혐오하는 일본인에게 화내지 않지만, 잘나가는 일본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과거에 머물러 있지는 않으나, 현재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한국 이민)라는 특수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 작품은 보편적 질문을 던진다. 참혹한 인생을 살아온 이들은 어떻게 현재를 살아야 할까. 선자는 이 복잡한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는다. 그저 응시한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