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별로’인 순간의 마법
며칠 전 넷플릭스 영화 카테고리에서 요즘 가장 인기가 많은 ‘크로스’를 봤다. 형사와 특수 요원의 세계를 다루고 황정민, 염정아, 전혜진 등 출연진도 화려해 기대가 컸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스토리와 캐릭터 모두 어디선가 본 듯하고 액션은 미지근했다. 부부 첩보물이라는 뼈대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에 가깝고, 남성 조직에서 활약하는 여자를 코믹하게 그린 부분은 ‘조폭 마누라’를 연상케 했다. 그래도 참고 끝까지 보았다. 싫든 좋든 끝까지 보고 평가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니까.
평론가로서 곤혹스러운 것 중 하나는 좋아하지 않는 작품을 보는 일이다. “그 작품은 별로”라는 한마디를 자신 있게 하기 위해 긴 러닝타임을 견뎌야 한다. 그럴 때는 이어질 장면을 예상하며 보기도 하고, 영화를 공들여 찍은 연출자의 마음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이 순간을 피할 수 있는 왕도는 없다. 그저 잠자코 영화의 시간을 견디는 수밖에.
최근 볼만한 영화를 추천해 달라는 지인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이런 경험은 낯설지 않다. 극장가에 추천작이 떡하니 걸리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매주 5~10편의 작품이 개봉하지만 마음이 흡족한 순간은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좋아하는 영화를 실컷 볼 수 있어 좋겠다”는 사람들 예상과 달리 내 일의 본질은 좋아하지 않는 영화를 무수히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싫은 것을 보아야 좋은 것을 알아볼 수 있다. 한 가지 음식만 먹은 사람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잘 만든 요리인지, 조리법은 어떤지 알아보는 안목은 비교군이 있을 때 길러진다. 평론가의 안목도 결국 그토록 싫어했던 작품들로 완성되는 셈이다.
우리 삶에 이른바 ‘명작’이라 표현할 순간은 많지 않다. 오히려 평범한 시간, 어떻게 봐도 그저 ‘별로’인 순간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빛나는 순간과 평범한 시간이 교차하며, 우리는 각자 삶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것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안목을 갖추게 된다. 되돌아보면 의미 없는 영화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하루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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