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자란 아버지의 작품들… 투명 TV를 캔버스 삼아 디지털로 만든다

허윤희 기자 2024. 8. 2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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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서을호 건축가와 함께 프리즈서 협업전 여는 서도호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선 개인전 개막
서도호 작가가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아버지 서세옥 작품 ‘행인’(1978) 아래에 앉았다. 그는 “아버지 작품 중에 도시가 표현된 그림은 이것밖에 없다. 그림에선 사거리이지만 더 확장해서 드넓은 대륙에 혼자 던져진 사람 같다. 제 인생과 비슷해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김지호 기자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서도호(62)가 아버지 그림 앞에서 멈춰섰다. 한국 수묵 추상의 거장 산정(山丁) 서세옥(1929~2020)이 간결한 획으로 완성한 ‘행인(行人)’이다. “사거리 한복판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인생을 표현하신 거예요. 제 인생이랑 비슷하죠. 드넓은 대륙에 혼자 던져진 사람 같잖아요. 이 작품도 지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있어요.”

점과 선으로 우주의 근원을 탐색한 거장의 수묵 추상이 아들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다. 9월 4일부터 7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서울 2024′에서 서도호가 동생 서을호 건축가와 함께 아버지 작품을 재해석한 특별한 전시를 선보인다. LG전자가 올해 초 발표한 투명 OLED TV인 ‘LG OLED T’를 최초로 활용해 디지털 콘텐츠와 설치 작품을 함께 펼친다. 19일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에서 만난 서도호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LG 제안을 받고 투명한 화면이라는 데 귀가 번쩍 뜨였다. 날밤 새우면서 막바지 작업 중”이라고 했다.

세계적 설치미술가 서도호가 서울 성북구립미술관 전시장에 걸린 아버지 서세옥의 작품 앞에 서 있다. /김지호 기자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도호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한국 작가로 꼽힌다. 내년 5월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고, 9월 4일 미국 휴스턴에서 또 다른 개인전이 개막한다. 지난 17일엔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인전 ‘스페큘레이션’이 개막했다. 2012년 리움미술관 전시 이후 국내에서 12년 만에 선보이는 대규모 개인전이다. 그는 “여러 작업이 동시에 진행 중이지만 아버지 작품의 제작 과정을 보며 자란 사람으로서, 일반 대중은 접할 수 없었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녹여 작품을 해석해 세상에 내놓고 싶은 욕망이 예전부터 있었다”고 했다.

세계적 설치미술가 서도호가 서울 성북구립미술관 전시장에 걸린 아버지 서세옥의 작품 앞에 서 있다. 두 작품 모두 9월 4~7일 열리는 '프리즈 서울 2024'에 나온다. /김지호 기자

서세옥은 ‘인간’이라는 주제를 점과 선을 통해 역동적으로 담아낸 한국화 거목. 서도호는 아버지가 한 획 한 획 기운을 쏟아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을 보며 자란 어린 시절 기억을 디지털 기술로 녹여냈다. 아버지가 인간의 형상을 제작해 가던 과정을 각각의 짧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움직임과 시간성을 시각화했다.

그는 “아버지는 수묵화를 하면서 그림 뒤 보이지 않는 무한한 우주와 공간을 자주 언급하셨다”며 “실연 과정에서 LG 올레드의 스크린이 투명해지는 순간, 하늘이 열리는 느낌이랄까.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수천년 동안 볼 수 없었던 그림의 뒷면을 보게 된 것 같은 경험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동양화론에서 기본이 되는 ‘기운생동(氣運生動)’을 가장 강조했다. 작업 과정은 일종의 행위 예술과 같은 움직임의 연속이었고, 그림은 그 움직임의 결과물이자 궤적과 같은 것이었다. 그 동세를 디지털 작업에 담으려 했다.”

전시장에서는 서세옥 화백의 원작 회화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즐거운 비’(1976), ‘행인’(1978), ‘춤추는 사람들’(1987) 등 7점이 나온다. 모두 서도호가 직접 고른 작품들이다. 대형 투명 천에 서세옥 작품을 인쇄한 커튼을 전시장 입구에 드리우고, LG OLED로 구성된 대형 미디어 월을 통해 서 화백의 육성과 작업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무극’도 상영한다. 서을호 건축가는 이 모든 작품을 아우르는 전시 공간을 연출했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전시장에서 한 관람객이 서도호의 ‘비밀의 정원’(2012)을 촬영하고 있다. 작가가 살았던 한옥과 정원을 16분의 1 크기로 제작해 화물칸에 실은 작품이다. /연합뉴스

한국 관람객들에겐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서도호 개인전이 벌써 화제다. 색깔이 전혀 다른 두 전시를 동시에 만나는 드문 기회. 서도호 하면 떠오르는 ‘천으로 만든 집’은 이번 전시에 없다. 대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작가의 상상력을 담은 기록과 스케치, 모형, 영상이 전시장을 꽉 채웠다.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라 흥미롭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전시 같지만, 작가는 “내겐 다 똑같은 작업”이라고 했다. 모든 작업의 바탕은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만들어준 서울 성북동 한옥 집이다. 자신이 살던 집을 영국 리버풀의 빌딩 사이에 끼워넣거나(다리를 놓는 집),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의 건물 옥상 끝에 위태롭게 올려놓은(별똥별) 작품도 모형과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서도호, '다리를 놓는 집'(2015). 작가는 영국의 산업 도시 리버풀의 두 건물 사이, 어린 시절 집을 축소한 모형을 끼워두었다. 전시장에는 충돌한 세 건물이 기묘하게 연결된 모습을 3D 모형으로 만든 버전을 선보인다. /아트선재센터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 전시된 서도호의 '향수병'. 바닷가에 불시착한 한옥을 물이 채워진 유리케이스 안에 구현해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아트선재센터

서도호는 “아버지가 추구했던 예술가로서의 자세, 철학, 그리고 꾸며주신 물리적 환경이 작가로서 제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제가 서울에서 살 때는 집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에 가고 서울 집을 떠나면서 비로소 서울 집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는 “집을 떠났기 때문에 집을 생각하게 됐다는 것. 그것도 결국 움직임이다. 움직임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하다”며 “집을 옮긴다는 생각 자체가 세상 우주 만물은 계속 변하고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 전시된 서도호 작가의 '공인들'.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 앞마당에 설치된 ‘공인들’을 6분의 1로 축소해 만든 신작이다. 기념비 아래 좌대를 떠받치는 수많은 민초들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전시장에선 인물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연합뉴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 전시된 서도호 작가의 '공인들' 아랫부분을 확대한 모습. 무거운 돌을 지탱하는 수많은 익명의 대중이 보인다. /연합뉴스

☞서도호(62)

창덕궁 연경당(演慶堂)을 본떠 지은 서울 성북동 한옥에서 자랐다.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해 미국 예일대 대학원에서 조각을 배웠고, 이후 뉴욕·베를린 등 세계 곳곳을 떠돌며 ‘집’의 의미를 탐구해왔다. 시드니 현대미술관(2022),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2019), 휘트니미술관(2017), 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2016), 도쿄 모리미술관(2015)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8년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서 연 개인전은 112만 명 넘는 관람객을 끌어모으며 그해 ‘세계에서 둘째로 많이 본 전시’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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