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독신인 김혜심 교무의 '손주 자랑'

김한수 기자 2024. 8. 2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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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2일 강원도 인제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 제28회 만해대상 시상식. 수상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혜심 교무가 수상소감을 밝히고 있다. /김지호 기자

“교무님(성직자)들이 ‘항상 부처님 마음으로 살라’고 하셨는데, 그 사탕을 보는 순간 ‘부처님 마음’은 어디로 싹 도망가 버렸어요. 사탕이 너무 먹고 싶어서요.”

지난 12일 강원도 인제군 ‘동국대 만해마을’. 이날 오후에 열린 만해대상 시상식에 앞서 올해 만해실천대상 공동 수상자인 원불교 김혜심(78) 교무와 인터뷰 하다 속된 말로 ‘빵 터졌’습니다.

김 교무가 이야기한 아이는 남아공의 원광센터에 다니던 초등학생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구멍가게에서 사탕을 훔치다 주인에게 들켜 혼구멍이 났는데, 뒤에 사연을 들은 김 교무가 아이에게 반성문을 써오라고 했더니 ‘부처님 마음’ 이야기를 써왔답니다. “다른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면 같이 놀아주지 않을까봐 걱정”이라는 반성문 내용이 얼마나 귀엽던지요. 김 교무는 이 사건 후 아이들을 모아 큰 봉지 사탕을 나눠주면서 “맘껏 먹어라. 그리고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대면 안 된다”고 타일렀답니다.

2024만해실천대상 수상자 원불교 김혜심 교무가 남아공 현지 어린이들에게 약 복용법을 설명하는 모습. /양종훈 교수 제공

인터뷰와 시상식 수상 소감을 통해 김 교무의 ‘손주 자랑’을 많이 들었습니다. 원불교 여성 교무는 독신입니다. 당연히 아들, 딸, 손주는 없지요. 그렇지만 김 교무는 아프리카에 수백 명의 손주를 두고 있었습니다. ‘세 살 때부터 원광센터에서 키워온’ 손주들이지요. 지금도 건강이 좋지 않지만 전북 익산의 거처에서 강원도 인제 시상식장까지 불원천리 달려오신 이유는 ‘손주 자랑’ 때문인 듯했습니다. 김 교무는 ‘손주 자랑’을 할 때에는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목소리도 또렷했습니다. 할머니들에게 ‘손주 자랑하려면 돈 내놓고 하라’고 하면 진짜로 돈 내놓고 자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김 교무의 손주 자랑이 딱 그랬습니다.

문제의 ‘부처님 마음’을 이야기했던 아이는 그 이후 잘 자라서 현지의 농과대학을 다녔다고 합니다. 김 교무는 “그 나이 아이들이 왜 갖고 싶고, 먹고 싶고 그렇지 않겠냐”며 “그 순간에도 부처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 변화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수백 번 가르치고 또 가르친 ‘세 살 버릇’

“아프리카에선 사람들이 다 ‘노 프라블럼(No problem), 노 프라블럼’을 입에 달고 살아요. 그런데 그게 바로 프라블럼이에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어요.”

지난 1995년 남아공을 처음 찾은 김 교무는 낙담을 거듭했답니다. 남자는 놀기만 하고 여성은 혹사 당하고, 아이들은 방치돼 있었다지요. 그럼에도 역시 희망은 아이들이었다네요. “어른들은 300~400년 식민통치의 습관이 배어 변화가 어렵지만 아직 물들지 않은 어린이들은 충분히 변화가 가능했다”는 것이지요.

비결은 ‘세 살 버릇’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었답니다. 앞서 말씀드린 ‘부처님 마음’도 그 중 하나이겠지요. 다행히 아이들은 센터를 참 좋아했답니다. 당시 남아공 아이들은 학교가 파하면 할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센터에는 비록 한국 PC방에서 버린 것이라도 컴퓨터도 있고, 사물놀이와 태권도도 배우고 방과 후 교실까지 있으니 1년 365일 아이들이 찾아왔다네요. 해가 져도 집에 가려고 하지 않아서 “제발 집에는 가라”고 달래야할 정도였답니다. 그 아이들에게 ‘세 살 버릇’을 제대로 가르친 것이죠.

김혜심 교무가 아프리카 아이들과 함께한 모습. /양종훈 교수 제공

김 교무는 ‘쓰레기 버리지 말고 청소하기’를 수백 번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왜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되는지, 왜 청소를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반복 또 반복해서 가르쳤다지요. “아프리카에선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래도 꾸준히 가르치면 조금씩 변화해요.” 수업이 일찍 끝나는 금요일 오후엔 아이들과 함께 센터 앞 공동묘지를 청소했답니다. 그렇게 꾸준히 청소하니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던 어른들도 잠깐씩 빗자루를 들고 거들기도 했다네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원광센터 아이들이 사물놀이 응원을 한 후 경기가 끝나자 자발적으로 청소를 했더니 현지 경찰이 깜짝 놀라더랍니다. 어른이고 아이고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김 교무는 “어른들처럼 물들지 않은 아이들은 우리나라 모범생보다 더 인성이 좋다”고 자랑합니다. 세 살부터 가르친 아이들이 이젠 청년이 돼 대학생·대학원생이 되고 취업도 하니 그 진가가 더욱 발휘되고 있답니다. 원광센터 출신 졸업생들이 추천받아 취업을 하면 고용주들이 그렇게 칭찬을 한답니다. 원광센터 출신 고교 졸업생 6명이 현지의 삼성전자 서비스센터 직원으로 채용된 일이 대표적이라고 했습니다. 2011년 더반 IOC총회 당시 원광센터 사물놀이팀이 10시간 동안 차를 타고 가서 기다렸다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직후 사물놀이 축하공연을 펼쳤는데, IOC 위원이던 이건희 삼성 회장과 부인 홍라희 여사가 고마워했답니다. 그 후 현지 삼성전자에서 직원이 와서 사정을 들어보고 가더니 흑인 마을로 직접 찾아가서 고등학교 졸업한 아이들 6명을 선발해서 교육시켜서 삼성전자 AS 직원으로 채용했답니다. 남아공에서는 대학 나온 백인들도 취업이 쉽지 않답니다. 그런데 흑인 마을에서 6명이 한꺼번에 취업을 했으니 마을 잔치가 벌어졌다지요.

원광센터 출신을 고용한 기업들도 반응이 좋답니다. “남아공에선 보통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근무시간이라고 하면 3시반부터는 일 안 하고 갈 준비를 해요. 그것도 하던 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가버려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오후 4시까지 일 다하고 작업도구도 다 정리하고 청소도 한 후에 퇴근하니 기업에서 좋아했지요.”

김혜심 교무(오른쪽)가 남아공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김 교무는 현지 학생들의 진학과 취업을 도와 동기를 부여했다. /김혜심 교무 제공

원광센터 출신으로 첫 대학 합격자 자랑도 들었습니다. 방과 후 교실을 운영한 지 3년쯤 지났을 때 처음으로 대학 합격자가 나왔답니다. 그 학생의 집안은 대학 공부를 시킬 형편이 못 됐지요. 김 교무는 국내외 백방으로 뛰어 장학금을 연결해주었고, 그 학생은 지금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유학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례들이 쌓이니 어린 학생들도 동기 부여가 되고 있답니다.

◇자기 밭에 이름·사진 간판 걸기

어린이들이 변하니 가족이 변하고 마을이 변했답니다. ‘협동농장’ 케이스도 흥미로웠습니다. 앞서 남자들은 일을 안 하고 놀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한번은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파이프를 까는 공사를 했는데 남자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아줌마, 할머니, 아이들만 나와서 땅 파고 파이프를 깔았답니다. 그 공사가 끝나고 마을 잔치를 하게됐는데, 그날은 마을 남자들이 다 몰려왔답니다. 화가 난 김 교무가 “일 안 한 남자들은 물도 마시지 말고, 씻지도 말라”고 호통을 쳤다지요.

그런 시간이 지나면서 김 교무는 남성들도 협동농장에서 일을 하게 만들 방법을 연구했답니다. 해발 1100미터 고지대에 밭을 일구고 사람들에게 일정한 면적을 나눴습니다. 그러나 일하지 않던 버릇이 단숨에 고쳐질 리는 없겠지요. 김 교무가 낸 아이디어는 해당 구역에 이름과 사진을 박은 함석판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주 들러서 가꾸는 밭은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만 손 놓고 있는 밭은 잡초가 우거졌겠지요. 당초 수확량에 따라 소득을 차등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시큰둥하던 사람들이 막상 자기 얼굴 사진이 걸린 밭에 잡초만 자라는 모습이 비교되자 변화했답니다. 아침 저녁에 잠깐씩이라도 밭에 나와 작물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김혜심 교무(오른쪽)이 식수 공사를 마치고 학생들과 기뻐하고 있다. /김혜심 교무 제공

김 교무가 남아공에 본격적으로 터를 잡은 것은 1996년, 그의 나이 만 50세 때였습니다. 김 교무는 “그 당시 너무 늦은 것 아닌가 했는데, 그때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이 변화된 모습을 어떻게 보았겠나”라며 “아이들이 변화하는 것을 보는 보람이 너무나 크다”고 말했습니다.

김 교무는 “수상 통보를 받고 처음엔 ‘보이스 피싱’인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상금(5000만원)까지 있다고 하니 더욱 의심스러웠답니다.(만해대상은 평화, 실천, 문예 등 3개 부문에 각 1억원씩 상금을 드립니다. 김 교무는 실천부문 공동 수상자여서 상금은 5000만원입니다.) 그 상금을 어떻게 사용할 계획인지도 여쭸습니다. 김 교무는 “할 일 많다”고 했습니다. “아프리카에 55개국이 있는데 저는 이제 겨우 2개국을 도왔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김 교무가 지금까지처럼 좋은 일에 상금을 쓰실 것을 믿고 또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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