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간 7000회 방송...美 ‘토크쇼 제왕’ 필 도너휴 별세
“낮 시간대 토크쇼의 중요성과 여성 시청자의 존재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걸 필 도너휴가 최초로 증명하지 않았다면 오프라 쇼는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는 19일 오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적었다. 함께 올린 흑백사진 속에서 윈프리는 턱시도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큼직한 안경을 쓴 한 남성과 웃으며 포옹하고 있었다. 이 남성이 낮 시간대 토크쇼로 1960~1990년대 미국 방송가를 주름잡은 ‘토크쇼의 제왕’ 필 도너휴(88)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은 도너휴가 19일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전했다.
1935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난 도너휴는 1967년 11월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한 방송국에서 ‘필 도너휴 쇼’(나중에 제목이 ‘도너휴’로 바뀜)라는 토크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토크쇼는 1996년 9월 13일까지 29년간 약 7000회 방송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전성기였던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는 전국 200여 방송국을 통해 송출됐고 평균 시청자 수가 800만명에 달했다. 시청자들은 스튜디오 방청 티켓을 구하기 위해 1년 6개월씩 기다리기도 했다.
도너휴의 쇼는 방청객 위주로 돌아가는 독특한 진행 방식과 동성애·페미니즘처럼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주제를 놓고 다양한 인물을 초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과감성으로 명성을 얻었다. 도너휴는 그전까지 토크쇼의 ‘공식’처럼 통했던 진행자의 오프닝(도입부) 독백, 밴드 연주, 소파를 없앴다. 오로지 그와 게스트가 하나의 주제에 대해 대화하고 때로는 청중에게 마이크를 들이밀고 질문하는 파격적 진행 방식을 선보였다. 뉴욕타임스는 “도너휴는 인권이나 국제 관계처럼 고상한 주제부터 ‘남성 스트리퍼’와 ‘안전한 난교 섹스’같이 얼굴이 붉어질 만큼 저속한 주제까지 질문을 던졌다”고 전했다. 그의 토크쇼 진행 방식은 후배 토크쇼 진행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워싱턴포스트는 “그는 진지하고 솔직한 주제를 다뤘고, 청중이 질문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경쾌한 포맷을 대중화해 오프라 윈프리 등 후계자에게 문을 열어줬다”고 했다.
도너휴는 논란이 될 만한 인물도 거리낌 없이 초대해 마이크를 건넸다. 첫 방송 게스트는 급진적 무신론자이자 페미니스트로 ‘미국에서 가장 미움받는 여성’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매덜린 머리 오헤어였다. 당대의 유명 인사들도 그의 쇼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복서 무하마드 알리, 배우 우피 골드버그가 그의 방송을 찾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넬슨 만델라가 오랜 수감 생활 끝에 1990년 석방됐을 때 처음으로 인터뷰한 인물이 도너휴였다. 1992년 미국 대선 때는 빌 클린턴과 제리 브라운의 민주당 경선 토론회를 진행했다. 도너휴 쇼는 한국에서도 1980~1990년대 주한미군 방송 AFKN 채널에서 방영됐는데, 주한미군 장병의 배우자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특히 즐겨 시청했다.
하지만 토크쇼의 제왕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는 1980년대에 시작된 ‘오프라 윈프리 쇼’ 등 수십개의 후발 프로그램에 밀리기 시작하며 1996년 방송계를 떠났다. 당시 낮 시간대에 방영되는 TV 토크쇼는 약 20개였는데 도너휴 쇼의 시청률은 그중 6~7위 정도였다. 2002년 MSNBC에 복귀해 ‘도너휴 쇼’를 진행했지만 역시 시청률이 부진해 6개월 만에 종영했다. 이후 마이크를 놓았다.
도너휴는 미국 방송계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에미상을 20차례 받았고, 1980년엔 ‘방송계의 퓰리처상’이라고 불리는 피보디상도 받았다. 올해 5월 그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하며 “도너휴는 수천번의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국가의 담론을 이끌었다”고 했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소셜미디어에 “우리 시대의 가장 어려운 이슈 앞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줬던 선구적 아이콘을 잃었다”는 글을 남겨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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