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왕후의 죽음…고종과 개혁세력, ‘불구대천’ 원수 되다

길윤형 기자 2024. 8. 2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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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의 조선의 갈림길 _13
‘친일파’의 핵심이었던 박영효의 실각은 일본을 패닉에 빠뜨렸다. 이제 일본이 ‘결단’할 차례였다. 죠슈번 출신의 퇴역 군인 미우라 고로 주조선 일본 공사는 회고록에 “임기응변으로 자유롭게 처리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결심했다”고 적었다. 그 ‘결심’이란 대원군을 다시 한번 끌어내 일본의 대한정책을 가로막는 ‘여우’인 명성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죠슈번 출신의 퇴역 군인인 미우라 고로(1847~1926) 주조선 일본 공사는 복잡미묘한 조선 외교를 이끌어 나가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는 공사로 부임하기 직전 조선에서 변란에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를 만나 “민비는 한국의 큰 여우로 모든 일의 장애가 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미우라가 청일전쟁과 삼국간섭 이후의 극히 민감한 시기에 왜 조선에 부임하게 됐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다. 훗날 ‘관수장군회고록’(1925)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제공

1895년 4월23일 발생한 ‘삼국간섭’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광분해 있던 일본에 닥친 큰 충격이었다. 당대 일본의 저명 언론인이었던 도쿠토미 소호(1863~1957)는 만년에 낸 ‘소호자전’(1935)에서 “이 랴오둥 반도의 반환은 나의 거의 모든 일생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이후 나는 거의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고 적었다. 자유민권을 내세웠던 도쿠토미의 사상은 이 일을 계기로 단숨에 군국주의로 기울었고, 이때 받은 치욕을 되갚아야 한다는 ‘와신상담’이 일본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이 된다.

이 무렵 일본은 개전 직후인 1894년 8월17일 각의 결정에 따라 조선을 반영구적인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려면 한반도의 전신(눈과 귀)·철도(팔과 다리)를 손아귀에 쥐고 이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곳곳에 군대를 배치해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본격 간섭에 나선 이상 충돌을 피하려면 방침 전환이 불가피했다.

새 접근법이 정해진 것은 6월4일 각의를 통해서였다. 일본은 이날 “장래 대한국 정략은 가능한 한 간섭을 멈추고 조선으로 하여금 자립하도록 하는 방침을 취해야 한다. (중략) 또 이 결의의 결과로서 이 나라의 철도·전신의 건과 관련한 것을 무리하게 실행하지 않기로 한다”고 정했다. 치욕스런 후퇴 결정이었다. 이 ‘충격’ 때문인지 청일전쟁을 주도했던 ‘면도날’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은 이튿날인 5일부터 가나가와현 오이소로 요양을 가기 위해 잠시 직을 내려놓는다. 후임은 훗날 일본의 ‘마지막 원로’가 되는 사이온지 긴모치(1849~1940)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귀국한 이노우에 가오루 주조선 일본 공사는 7월1일 사이온지 외무대신 임시대리에게 ‘조선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노우에는 이 글에서 조선이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 되어 “개혁을 실행하려 해도 재원을 갖추지 못해 하나도 착수하지 못했다”는 사정을 전하면서, 청에서 받는 배상금(3억엔) 가운데 500만~600만엔 정도를 혜여(무상지원)해도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이어, 전신에 대해선 일본군이 전쟁 중에 설치한 군용선까지 모두 조선에 반환하고, 철도는 경부선은 급하지 않으니 짓지 말고, 경인선은 자재·기술 등을 지원해 조선이 스스로 건설하게 돕자고 주장했다. 군대 주둔 역시 고종의 허락을 받아 조선이 먼저 의뢰하는 형식을 취하자고 했다. 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간섭을 피하고 주변국과 충돌을 피하려는 ‘온건한 안’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된다면, 많은 전비와 젊은이들의 피를 쏟아부어 쟁취해낸 청일전쟁의 성과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그야말로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조선에선 일본의 간섭이 약해진 틈을 타 고종과 명성왕후의 폭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윤식 외부대신은 6월26일 자신을 찾아온 일본공사관의 고쿠부 쇼타로 서기생에게 “폐하 스스로가 재가하신 법령을 무시하고 이를 실천하는 데 뜻이 없으니 개혁하려던 일들은 마침내 흐지부지됐다”는 한탄을 쏟아낸다. 이어, 을미사변이라는 비극의 단초가 되는 의미심장한 말을 입에 올리게 된다. “애당초 일이 이와 같이 된 원인은 왕비가 장차 국가를 그르치게 될 것을 깨닫지 못하고 민씨 일족에게 정권을 장악하게 하려는 유일한 희망에서 비롯된 것 같다. 만약, 민씨 일족이 러시아 세력에 의지하여 그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면 국가의 큰 난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될 것이다.” 화들짝 놀란 사이온지는 이노우에가 서울을 비운 사이 대리공사를 맡고 있던 스기무라 후카시에게 “박 내부대신(박영효)과 비밀리에 면회해 이 사실을 물어보라”고 지시한다.

이 시점에서 일본과 조선의 개혁 세력 앞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상황 변화를 받아들여 개혁을 포기하는 길, 두번째는 지난해 7월에 이은 ‘2차 쿠데타’를 통해 다시 굳건히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박영효였다. 그는 이 모든 일이 부질 없는 옛이야기로 변한 뒤인 1930년 1월7치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민후의 세력은 여전히 궁중·부중(정부)에 미쳐 근본적으로 황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소기한 목적을 달할 수 없을 형세”였다며 “우리 몇은 단연한 방침을 세워 보위를 황태자께 양위하시도록 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반역 계획은 7월6일 탄로 나 박영효는 이튿날 갑신정변(1884) 이후 두번째 일본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친일파’의 핵심이었던 박영효의 실각은 일본을 패닉에 빠뜨렸다. 이제 일본이 ‘결단’할 차례였다. 급히 도쿄에서 돌아온 이노우에는 7월25일, 30일, 8월6일 세차례나 고종 부부와 만나 △명성왕후의 정치 참여 용인 △민씨 척족에 대한 사면권 허용 △300만엔 무상기증 등의 내용이 포함된 회유책을 쏟아냈다. 이 만남을 마친 뒤 이노우에는 6일 사이온지에게 전문을 보내 “알현을 거듭할수록 격의가 없어져 지금까지 숨겨왔던 러시아와의 관계도 차차 털어놓았으며 앞으로 본관이 진주(陳奏·윗사람에게 사정을 아룀)하는 일은 반드시 확실히 지키겠다고 명언했다”고 전했다.

이 온건책에 대한 일본의 회답은 당연(!)하게도 이노우에의 ‘경질’이었다. 죠슈번(현 아마구치현) 출신의 퇴역 군인 미우라 고로(1847~1926)가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 것은 7월19일, 조선 발령을 명 받은 것은 8월17일이었다. 그는 정식 임명 날 정부에 제출한 ‘대한 정책에 대한 의견서’에서 △조선을 일본의 단독 보호국으로 만든다 △중립국으로 만든다 △러시아와 분할 점령한다 등 세가지 안 중에서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물었다. 놀랍도록 흥미로운 것은 일본 정부의 반응이었다. 그저 ‘빨리 부임하라’고 재촉할 뿐 답을 주지 않은 것이다. 미우라는 1925년 낸 회고록에서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 “임기응변으로 스스로 자유롭게 처리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결심했다”고 적었다. 그 ‘결심’이란 대원군을 다시 한번 끌어내 일본의 대한정책을 가로막는 ‘여우’인 명성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명성왕후(1851~1895)의 사진이 존재하는지를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이어져 왔다. 이 사진은 민씨 척족의 일원이었던 민영찬(충정공 민영환의 친동생)의 동아일보 인터뷰(1930년 1월17일치)에 실려 있던 것이다. 우치다 사다쓰치 서울 영사에 따르면, 일본 낭인들은 명성왕후의 볼의 위쪽에 벗겨진 자국이 있다는 한 궁녀의 말을 듣고 이미 숨진 부인들의 주검을 확인해 그 중에 한명에게서 비슷한 흔적을 찾아냈다. 명성왕후의 주검은 이후 건청궁 밖의 소나무 숲에서 소각됐다. 아직 숨이 붙어 있어 불타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느꼈다는 러시아 쪽 기록도 있다.

명성왕후가 살해되기 전날인 10월7일 밤 서울 하늘엔 밝은 달이 빛났다. 이날 경복궁에선 불과 1년 4개월 전 동학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는 큰 실책을 저질러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민씨 척족의 우두머리인 민영준의 궁내부 복귀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갑오개혁에 대한 명성왕후의 사실상의 ‘승리 선언’이었다. 그로부터 몇시간 뒤 명성왕후는 조선 훈련대 제2대대, 일본군 후비 제18연대, 구마모토 국권당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인 낭인 30여명이 경복궁에 난입한 가운데 일본인에 의해 건청궁 옥호루에서 잔인하게 살해됐다. 정오께 공사관으로 돌아온 미우라는 영문을 몰라 하는 우치다 사다쓰치 서울 영사에게 “민당 무리들이 러시아와 결탁하여 더 세력을 떨치고 내정개혁 사업을 점차 모두 파기하고 있다. 민영준을 등용해 국정을 맡게 하여 만사를 러시아에 의뢰하고 우리에게서 이반하려 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살해 과정은 너무 가슴이 아파 따로 옮기지 않는다.

경복궁의 북동쪽에 자리한 건청궁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곳이다. 명성왕후는 1895년 10월8일 새벽 건청궁의 안채인 곤녕합 옥호루에서 살해됐다. 조선총독부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15년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이 집을 헐고 그 터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다. 2007년 10월 복원돼 일반에 공개 중이다. 문화재청 제공

미우라의 의심은 사실이었을까. 숨진 명성왕후가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고종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친서가 발견됐다. 고종 부부에게 우호적이었던 카를 베베르 공사의 유임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몰랐겠지만, 러시아는 베베르가 잠시 더 서울에 머무르게 했을 뿐 공사 교체 방침을 바꾸진 않았다. 러시아의 ‘전략적 관심’은 조선이 아닌 만주에 있었고, 고종의 대러 접근은 나라가 망하는 순간까지 ‘짝사랑’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모든 게 판단 미스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성과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과 “조선과 러시아가 깊게 결탁하고 있는 것 같다”는 피해 의식에서, 조선의 개혁 세력은 ‘개혁 완수’라는 책임감 탓에 명성왕후 살해라는 “역사상 고금미증유의 흉악(歷史上古今未曾有ノ兇惡)”(우치다의 11월7일 보고서)을 저질렀다.

우치다 사다쓰치(1865~1942)는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이 일어나던 격동의 시기에 한성(서울)공사를 지냈다. 을미사변이 발생한 지 한달 뒤인 1895년 11월7일 그가 작성해 사이온지 긴모치 외무대신 임시대리에게 보낸 보고서는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한 ‘양심의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이 문서에서 을미사변은 미우라 고로 주조선 일본 공사가 계획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며 “많은 양민과 안녕질서를 유지해야 할 임무를 띤 당 영사관원과 수비대까지 선동하여 역사상 고금 미증유의 흉악을 행하게 되었음은 우리 제국(일본)을 위하여 실로 유감천만한 것”이라고 결론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제공

그로 인해 조·일 두 나라의 운명은 크게 뒤틀리게 된다. 조선이 살아남으려면 고종과 개혁세력이 힘을 모아 입헌군주국을 향한 정치 개혁을 완수해야 했다. 하지만, 을미사변으로 고종과 조선 최고의 에이스 관료들이던 김홍집·어윤중·김윤식·유길준 등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타협의 가능성이 사라지며 조선의 운명은 더 위태로워졌다.

일본의 피해는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현장에서 일을 저지르면, 위에선 이를 추인하는 병폐가 시작됐다. 일본은 이 ‘변태적 속성’을 다스리지 못해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에 잇따라 휩쓸리며 끝내 파멸했다.

미우라는 훗날 회고록에서 1896년 1월20일 불기소 처분을 받아 석방된 뒤 메이지 일왕을 모시던 요네다 도라오 시종이 찾아왔던 얘기를 적고 있다. “윗분께 큰 심려를 끼쳤다.” “아니네. 사건에 대한 얘기를 들으시고, ‘(미우라가) 할 때는 하는구나’라는 말이 있으셨네.”

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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