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에코델타동’ 탄생기 [전국 프리즘]
김영동 | 영남데스크
1986년 겨울쯤 부산 부산진구 당감동에서 강서구 명지동으로 이사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인 나에게 그곳은 낙동강 하구와 바다가 보이는 곳이자, 파밭과 논이 끝없이 펼쳐진 정말 낯선 동네였다. 동네 터줏대감은 60대 강아무개 할아버지였다. 학교 교장으로 은퇴한 그를, 동네 아이들은 ‘강 짝지(지팡이의 경상도 방언)’라고 불렀다. 항상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말썽을 피우는 아이들에게 훈계를 일삼던 엄격한 분으로 기억한다. 쭈뼛거리며 처음 인사한 나에게 어르신은 대뜸 나에게 동네를 설명했다.
“명지라고 이름이 붙은 것에는 유래가 있다.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여기 어딘가에서 먼저 변을 예고하는 북소리와 종소리 같은 소리가 지역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한자로는 ‘울 명’에 ‘뜻 지’다. 이사를 왔으니, 니가 사는 곳의 지명 뜻은 알아야제.” 명지동 지명과 관련해 조선시대 중종 때(155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명지도 기록이 있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명지도라고 표시돼 있다고 한다.
부산시는 2012년부터 명지동·대저2동·강동동에 걸쳐 면적 11.7㎢, 입주자 8만여명 규모의 친환경 스마트 신도시인 ‘에코델타시티’ 조성에 나섰다. 환경을 뜻하는 에코(eco)와 낙동강 삼각주를 뜻하는 델타(delta)를 합성한 이름이다. 친구들 집은 헐렸고, 드넓었던 파밭도 사라졌다.
그렇게 에코델타시티를 잊고 지내던 지난해 12월, 관할 지자체인 강서구가 명지동 등에 걸쳐 있는 에코델타시티의 새 법정동 이름으로 ‘에코델타동’을 선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로 다른 3개 동에 걸쳐 있다 보니 신분증과 재산권 등에 쓰이는 법정동 명칭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고, 지난해 10월 에코델타시티 아파트 입주 예정자 등을 대상으로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라고 했다. 이름이 확정되면, 전국 3600여개 법정동 가운데 외국어를 법정동으로 사용하는 첫 사례가 될 터였다.
곧바로 한글학회에서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우리말로 지어야 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강서구의회도 “외국어 사용을 납득하기 어렵고, 한글 사용을 규정한 국어진행조례에도 반한다”며 반대했다. 명지동 원주민들은 “마을 역사가 쌓여 만들어진 지명을 근본도 없는 영어 단어 조합으로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에코델타시티에 입주하는 주민 일부는 “대부분의 입주민이나 입주 예정자들이 원하는 이름”이라며 맞섰다. 지난 5월 지명 결정권이 있는 행정안전부는 “법정동 신설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외국어 명칭이 국어기본법 등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에코델타동을 승인하지 않았다.
한바탕 소동이 잠잠해지나 싶었지만, 강서구는 이번에는 행정동 이름을 에코델타동으로 바꿀 방침이다. 법정동이 법적 주소라면, 행정동은 행정기관이 편의상 설정하는 것으로 법정동과 이름이 다른 경우도 왕왕 있다. 강서구는 도로명 주소에 외래어를 사용하고 있고, 주민이 원하는 이름이라 행정동 이름을 바꾸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부연한다. 하지만 강서구가 행정동 이름을 에코델타동으로 지은 뒤 몇년 지나 법정동 승인에 다시 도전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박상준 강서구의원은 지난 6월 열린 강서구의회 정례회 본회의에서 “지역의 역사적 가치 등을 반영하지 못한 에코델타동으로 결론을 내놓고, 끼워 맞추기식 행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주민과 반대 주민 의견은 묵살한 채 전국 최초 외래어 법정동 타이틀에만 집착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주민 불편 해소에 앞장서진 못할망정 주민 갈등만 조장하는 노이즈 마케팅은 이제 멈춰야 한다”고 비판했다.
“동네 이름은 백년을, 천년을 가는 거여. 동네 정체성이자 역사지. 절대로 잊거나 까먹으면 안 된데이.” 강 짝지 어르신의 말씀이 떠오른다. 강서구가 ‘에코델타’라는 이름만 고집하지 말고, 전체 주민 의견을 경청한 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름으로 정했으면 한다.
yd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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