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도설] 눌원 신덕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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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하루 전인 지난 14일 자 국제신문 1면에 '이 적산가옥에 독립운동가 문패를' 기사가 실렸고 그 파장은 컸다.
경제 사회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눌원 신덕균(1909~1999) 선생이 40년가량 살았던 이 집을 '눌원 신덕균의 집'으로 부르자고 기사는 제안했다.
신덕균 가문이 이어가는 눌원문화재단(이사장 신성수)은 부산박물관이 올해 마련해 주목받은 특별기획전 '수집가전-수집의 즐거움, 공감의 기쁨' 성공에도 큰 힘을 보탰다고 소문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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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하루 전인 지난 14일 자 국제신문 1면에 ‘이 적산가옥에 독립운동가 문패를’ 기사가 실렸고 그 파장은 컸다. 현재 부산 중구문화원으로 쓰는 건물을 일제강점기 일본인 건축가 이름을 딴 ‘다테이시 가옥’으로 표기하는데, 이는 잘못됐다는 취지였다. 경제 사회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눌원 신덕균(1909~1999) 선생이 40년가량 살았던 이 집을 ‘눌원 신덕균의 집’으로 부르자고 기사는 제안했다. 자연스럽게 눌원 신덕균이라는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부산에 살며 부산에 사업 기반을 두었던 신덕균 선생은 1957년부터 제2대와 제3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냈고, 대한곡물협회 회장을 두 차례 역임했으며, 1960년대 전경련 부회장을 맡았다. 이런 이력만으로도 그가 엄청난 부호이자 중요한 경제인이었단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기성세대라면 ‘동방유량’ ‘해표식용유’를 모를 수 없다. 해표식용유는 그때 전 국민의 한가위 튀김과 전을 책임졌다.
1958년 기업가 신덕균은 눌원문화상을 제정한다. 6·25 전쟁이 끝난 지 5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국토 대부분이 여전히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고 국민 대부분이 문화·예술에 미처 눈길을 주지 못한, 극도로 가난하고 어렵던 시대다. 눌원문화상 역대 수상자를 살펴보다 그 면면에 깜짝 놀랐다. 특히 신덕균 선생이 왕성하게 활동했을 전반부(대략 1970년대 후반까지) 명단이 눈길을 끈다. 부산 경남을 중심으로 한국 예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예술가 이름이 많다.
1959년 1월 26일 시상식을 연 제1회 눌원문화상 수상자는 문학가 설창수 선생이다. 제2회는 김봉용 나전칠기공예가를 선정했다. 제3회 수상자는 음악가 윤이상. 그 뒤로 사진가 정인성, 시조시인 이영도, 향파 이주홍, 부산민속예술보존회(동래들놀음), 요산 김정한, 먼구름 한형석, 음악가 이상근, 사진가 허종배, 문학가 박문하 김태홍 임신행…. 춤의 거장 이매방 선생은 1977년 제19회 수상자이다. 신덕균 회장이 1977년 세운 눌원문화재단 또한 지역 발전·문화예술 발전에 톡톡히 기여해 왔다.
신덕균 가문이 이어가는 눌원문화재단(이사장 신성수)은 부산박물관이 올해 마련해 주목받은 특별기획전 ‘수집가전-수집의 즐거움, 공감의 기쁨’ 성공에도 큰 힘을 보탰다고 소문 났다. 게다가 신덕균 선생이 젊은 날 백산 안희제 선생과 연을 맺고 민족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실도 언급된다. 명문가를 일군 눌원 신덕균 선생을 더 잘 기리고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조봉권 부국장 겸 문화라이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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