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나이테를 위하여!
녀석들은 언제 봐도 특별하군요. 긴 목과 머리, 짧은 발과 꼬리, 둥근 등과 바닥에 납작 붙은 배, 어디를 들춰봐도 따로 색을 칠하거나 모양을 만들어 넣지 않았습니다. 목공예 공방을 하는 집안 아우에게서 거북이 한 쌍을 구입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째 책상 위에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나무의 나이테들입니다. 거북이의 모양대로 깎아만 놨을 뿐인데 거북이의 눈 코 입은 물론 걸음의 방향까지 살려냅니다.
물에 씻어 닦아 놓고 보니 촘촘한 계단 같기도 하고 등고선 같기도 한 나무의 나이테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생명선이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나이테는 말 그대로 나무가 살아온 시간을 보여주겠지요. 하지만 나무의 종류에 따라 성장 속도가 다르고 그 모양도 다르다고 합니다. 나이테가 생기지 않는 수종도 있고 태생과 주어진 환경에 따라 그 성장 역사도 다를 것이니 나이테를 통해 다만 나무의 삶을 짐작할 뿐 다 알 수는 없겠지요.
한때 교정의 회화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면 환한 꽃들 속에서 우는 꽃을 찾을 수 있을까 한참을 서성거리기도 했습니다. 우는 꽃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 나무들 세상도 인간 세상만큼이나 복잡하고 그 삶이 다양하겠다 생각했지요. 얼핏 한 곳에서 나고 자라 단순하고 지루하겠다 싶지만 나무들도 우리가 모르는 자신들의 삶을 구구절절 살아내고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웃고 울고 아프게 꽃들을 피우며 시들다 떨어지면서요.
나이테가 어디 나무에게만 있겠는지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의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느냐에 따라 자신은 물론 주변까지 변하게 할 테니까요. 목표를 향해 멈추지 않고 묵묵하게 걸어갈 때 우리는 기어이 그곳에 당도할 것입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꿈꾸는 삶이 만든 나이테는 생의 구간을 특별하게 이어가겠지요. 누군가의 나이테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 풍요롭게 풀리도록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나이를 잊고 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물리적인 숫자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그때그때 만나는 시간과 공간에 열렬하고자 했습니다. 하루를 사흘처럼! 요즘엔 이런 작심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자지도 쉬지도 않고 생산적인 일에만 시간을 다 쏟자는 것은 아닙니다. 남은 시간을 좀 더 특별하고 뜻깊게 보내자는 것이지요. 나이를 의식하니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결국엔 생의 막바지로 가는 발자국들을 신중하고 의미 있게 찍자는 뜻 아니겠는지요.
동네 정자나무 아래 나무 이상의 나무들이 둘러앉았습니다. 여름 내내 수군수군, 세상을 펼치고 걱정하며 꽃도 잎도 다 진 속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나무든 사람이든 자신을 격려하며 어느 지점까지 당도한 이들은 그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다양한 진폭이 풍요롭습니다. 가끔 사방이 아득한 곳에서 방향을 못 잡고 주춤거리기도 했겠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방점으로 찍혀 삶의 전환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픈 다리를 두드리는 고목의 나이테들은 믿을만합니다.
친구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습니다. ‘어머니 사랑해요’라고 쓴 글을 가슴에 붙이고 푸짐한 고희 상 앞에서 편안하게 웃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떻게 여기까지 당도했는지 한참 세어야 될 만큼 여러 겹의 나이테를 둘렀군요. 좁고 가파르게, 혹은 넓은 문양을 새기며 건너온 우리 시간들을 알기에, 울퉁불퉁한 서로의 나이테를 격려합니다. 시간이 멈추는 그날까지 서로 토닥여주자고 말없이 끄덕였지요. 한참을 쿡쿡거리다 전화를 끊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 우리는 유독 서성거리게 되지요. 완성이든 시작이든 다시 새 걸음을 놓자는 각오일 것입니다. 뜨거운 여름을 견디는 것도, 아름다운 가을 색으로 물드는 것도 세상과 자신을 향한 사랑의 힘이며 농도 아니겠는지요. 나무의 나이테가 거북이의 눈빛으로 다시 살아 오늘도 사방을 흔들 듯 우리도 어떤 식으로든 나이테를 두르고 있습니다. 그게 어떤 삶의 흔적이든 누구에겐 교본으로, 역사로 재창조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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