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법이 달라졌다” 돌아온 간호법에···보건의료계 긴장감 고조
의협, 당정 향해 “정권 퇴진운동” 경고장
간협 “법적 보호장치 없이 불법 내몰아”
간호조무사 등 보건복지의료연대도 예의주시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폐기됐던 간호법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커지면서 보건의료계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정부와의 투쟁에 집중하는 사이 타이밍을 놓친 의사단체는 뒤늦게 당정을 향해 "간호법 입법을 중단하지 않으면 정권 퇴진 운동에 나서겠다"며 경고장을 날렸다. 의대 증원 추진에 반발해 의료현장을 떠난 전공의들을 대신해 공백을 메워 온 간호사들은 간호법안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법안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간호조무사를 비롯해 지난 21대 국회 때 의사들과 함께 간호법 제정을 막아섰던 14보건복지의료연대는 간호법 제정안의 세부조항 논의사항을 지켜보며 실리를 챙기겠다는 입장이다.
20일 정부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여야가 이달 28일 본회의를 열어 비쟁점 민생 법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하면서 간호법안의 국회 통과 가능성이 커졌다. 작년 4월 야당 주도로 국회(21대) 본회의를 통과했다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된 지 1년 여 만에 상황이 반전되면서 보건의료직역들의 셈범이 복잡해지고 있다.
간호법은 현재 의료법에서 규정하는 간호사 등의 업무를 떼내 독자적인 법률로 제정하자는 것이다. 간호사 업무 범위와 간호인력 수급, 양성 및 근무환경 개선 등에 관한 사항을 좀 더 명확히 하는 데 목적을 둔다. 22대 국회 개원 이후 국회에서 여야가 발의한 간호법 제정안은 4건이다. 그동안 법적 근거가 없어 관행적으로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의사 대신 의료행위를 해오던 ‘PA(Physician Assistant·진료보조) 간호사'를 제도화하는 안이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필수의료 분야 기피 현상으로 인해 의사가 부족해지면서 현장에서 활동 중인 PA 간호사가 빠르게 늘어나던 가운데 전공의 이탈로 수요가 급증한 탓이다. 보건복지부는 전국에 PA 간호사가 1만3000명 이상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대한간호협회(간협)는 비공식적으로 근무하는 PA 간호사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를 훌쩍 넘어설 것이라고 해석한다.
간협은 현행 의료법이 간호사 업무범위 등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해 불법 의료행위를 조장한다며 이미 보건의료직역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PA 간호사를 제도화하고 제대로 된 교육과 보상체계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간호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가 의료공백을 메우겠다며 지난 2월부터 PA 간호사가 합법적으로 의사 업무를 합법적으로 대신하도록 하는 시범사업을 실시한 만큼, PA 간호사 제도화는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의견이다.
간협이 6월 19일∼7월 8일 수련병원 387곳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소속 간호사의 62.4%는 병원이 전공의 업무를 일방적으로 떠넘겼다고 밝혔다. 30분~1시간 남짓의 교육 후 전공의 업무를 하도록 강요받고 있다는 것이다. 조사에 참여한 임상간호사들은 "업무 교육 프로그램이 따로 없어서 전공의 업무를 간호사가 간호사에게 가르치는 상황이다", "30분∼1시간 정도 교육한 후 (PA) 업무에 투입하고 있다", "점점 더 일이 넘어오고 있고, 교육하지 않은 일을 시킨다"고 증언했다. 수련병원 10곳 중 6곳은 정부가 PA 간호사를 합법화한 시범사업에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간호사들에게 의사 업무를 하도록 지시하는 탓에 현장 간호사들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불안 속에서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탁영란 간협 회장은 "정부 시범사업 지침에는 '근로기준법 준수'라고 명시돼 있지만 의사 집단행동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간호사들의 근무환경은 날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며 "간호사에게 희생만을 강요받지 않고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국회에서 간호법안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협은 여전히 간호법이 제정돼 간호사가 의사 업무를 대신할 수 있게 되면 환자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임현택 의협 회장은 전일(19일) 기자회견에서 "국회는 오는 22일까지 의료계가 반대하는 간호법 등 의료 악법 진행을 중단하라"며 "(그렇지 않으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정권 퇴진 운동을 할 것"이라고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
정부가 의사 면허만으로 개원과 독립진료 역량을 담보할 수 없다며 향후 '진료 면허'(가칭)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선언한 가운데 간호법 제정 가능성이 높아지자 의사사회의 위기감은 크다. 간호법이 제정돼 의사 업무의 상당 부분을 간호사들에게 내주면 의사의 진료독점권에 금이 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가 의사들이 대거 진출한 피부·미용 분야에 일정 자격을 갖춘 간호사가 시술할 수 있도록 허용할지 여부를 논의하겠다고 언급한 것도 이러한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대목이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양당 모두 간호법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만큼 국회 통과 자체가 어렵지 않을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의대 정원 증원을 계기로 촉발된 의료 공백 장기화가 변수로 작용해 1년 여만에 정부·여당도 찬성 쪽으로 입장을 바꿨기 때문이다. 지난해 의협이 간호법을 막는 데 힘이 되어줬던 '14보건복지의료연대'마저 달라진 기조를 취하면서 의협의 입지는 한층 좁아졌다. 의협과 함께 단식투쟁을 벌이며 간호법 저지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대한간호조무사협회(간무협)는 조건부 찬성으로 선회했다. 14보건복지의료연대에 소속된 다른 직역 단체들도 이날 오후 회동을 갖고 간호법 심의 과정 등을 예의주시하자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간무협 관계자는 "지난 21대 국회 때처럼 단체행동을 같이 하기엔 각 직역들의 이해관계가 너무도 다르다"며 "22일 국회에서 논의될 간호법 제정안의 세부조항 중 간호조무사 시험 응시자격을 고졸 학력으로 제한하는 내용이 빠지면 간호법 제정을 막아설 이유가 없다. 국회 논의사항을 지켜보고 방향을 정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안경진 의료전문기자 realglasses@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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