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 기초자료 쌓아올려 ‘작품 평가 기준’ 세웠죠”
[가신이의 발자취] ‘1호 만화평론가’ 손상익을 기리며
1990년 ‘스포츠조선’이 창간됐다.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 양대 체제였던 스포츠신문 시장에 3파전이 벌어졌다. 연예인을 전면에 내세운 특종 경쟁이 1차전이었다면 2차전은 연재만화를 통한 경쟁이었다. 당대 최고의 만화가들이 3사의 전쟁에 선봉장 역할을 했고 신문사별로 5~6명의 만화가가 매일 4~6페이지 분량의 장편 연재만화를 게재했다. 1칸 정치만평, 4칸 생활만화로 규격화된 기존 신문만화와는 전혀 다른 형식의 만화가 만들어졌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너무 큰 성공은 당시 만화계가 감당하지 못할 ‘큰일’로 돌아왔다.
당시 연재된 만화들은 매일 아침 가판대에서 신문을 구매하는 ‘남성 성인 독자’를 타깃으로 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타깃 독자층 밖의 사람들은 불편해했고 일부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서울 와이엠시에이(YMCA) 등 17개 시민단체는 ‘음란폭력성조장매체대책시민협의회(이하 음대협)’를 결성하고 ‘스포츠신문의 음란 폭력성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악영향과 대중문화의 저질화를 우려’한다며 이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스포츠신문의 ‘음란성과 폭력성’을 별점으로 평가하고 그 결과를 해당 신문사와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는 기업에 알렸다. 그리고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는 기업에 대한 불매 운동과 함께 만화가와 신문편집자를 고발했다.
1991년 만화평론 신춘문예로 등단
자료나 근거 없는 비평 반대하며
한국만화 자료 수집과 분석에 열의
한국만화 역사서 ‘만화통사’ 내고
만화인명사전과 서지정보집 출간
사비로 한국만화문화연구원 만들어
2년 과정 평론가 양성 프로그램도
스포츠신문 3사는 이들의 행태를 비판하며 ‘표현의 자유 옹호론’과 ‘대중문화 부국론’ 등을 펼치며 대응했지만 ‘음란 폭력성’을 내세운 음대협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스포츠신문 3사는 장편 연재만화 게재와 타블로이드판 만화부록 발행을 중단했고 장문의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리고 1991년 1월 ‘스포츠서울’은 자구책의 하나로 자사 신춘문예에 만화평론 부문을 신설하고 첫 번째 당선자를 배출했다. ‘공인 만화평론가 1호’로 불리는 손상익의 탄생이다. ‘문화의 질을 가려내는 법 제도적 장치가 없이 상업적 논리와 문화생산업자들에게만 의존하는 현재 상황에서 문화가 자정능력을 갖기 위해서(한국기독공보, 2000·06·17)’는 대중문화에 대한 모니터링 활동과 평론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음대협의 주장을 수용한 결과였다.
1호 평론가 손상익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음대협의 요구나 스포츠신문 또는 만화계의 기대와도 달랐다. ‘만화 작품의 질’을 가려내는 대신에 한국만화의 원류와 역사를 찾아 제시하겠다고 했다. ‘만화 심의 등을 통해 자정능력’을 갖게 하는 대신에 전문 역량을 지닌 만화인을 육성해 산업계에 배출해야 한다고 했다. 음란 폭력성 시비로 초토화된 만화계 입장에서는 ‘한가한 소리’였다. 손상익은 ‘만화를 평가하기 위한 잣대’가 있어야 만화계가 바로 설 수 있다고 했다. ‘잣대’도 없이 평하고 논하는 것을 누가 동의하겠냐며 시민단체의 활동을 에둘러 비판했고 기초 자료도 만들지 못하는 만화계와 정부를 질타했다.
1996년 한국 만화 역사서인 ‘한국만화통사’가 발행됐고 사비를 들여 설립한 한국만화문화연구원에서는 2년 과정의 평론가 양성 프로그램이 운영됐다. 배출된 연구원들은 만화산업 전반에 걸쳐 활동했고 2002년 만화인명자료집 ‘한국만화인명사전’과 만화서지정보집 ‘만화가이드2002’를 출판했다. 이 책의 내용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운영하는 디지털만화규장각의 기초 자료가 됐고 당시 오픈한 인터넷만화서점, 온라인만화서비스, 검색포털사이트 등에 데이터베이스(DB) 자료로 제공됐다. 그렇게 22년이 흐른 지금 만화계는 여느 대중문화 장르보다 빠르게 디지털화됐고 웹툰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세계화하는데 성공했다. ‘잣대’가 마련됐고 ‘착실히 쌓은 기초’가 제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그런 세상의 받침을 세운 손상익은 이제 이곳에 없다. 2024년 8월 10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 그가 애써 만든 ‘잣대’를 우리는 잘 가꾸고 있는지 고민한다.
박석환/만화평론가·재담미디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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