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399> 선조 사위 박미가 죽자 만사를 지어 그의 삶을 읊은 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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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지고 화려한 자리 관심 두지 않고(脫略膏華地·탈략고화지)/너울너울 문단에서 날아다니셨다네.
/ 진작에 맑고 뛰어남을 알고 어여삐 여겼다만(早知憐俊爽·조지련준상)/ 그 누가 기가 꺾이고 몸이 상함을 슬퍼하랴.
박미는 또한 선조의 원비 의인왕후의 외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가 지은 자찬묘지인 자지(自誌)에서 한유의 말을 인용해 자신은 글이나 지으며 한평생 살려 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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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脫略膏華地·탈략고화지
기름지고 화려한 자리 관심 두지 않고(脫略膏華地·탈략고화지)/너울너울 문단에서 날아다니셨다네.(婆娑翰墨場·파사한묵장)/ 진작에 맑고 뛰어남을 알고 어여삐 여겼다만(早知憐俊爽·조지련준상)/ 그 누가 기가 꺾이고 몸이 상함을 슬퍼하랴.(誰更惜摧傷·수갱석최상)/ 술에 취해 영욕을 잊어버렸고(熟醉忘榮辱·숙취망영욕)/ 높이 노래 부르며 옳고 그름에서 물러나셨다네.(高吟謝否臧·고음사부장)/ 오로지 부마로서 응했을 따름이어서(唯應恩澤表·유응은택표)/ 당양후에게 부끄럽지 않았다네.(不愧杜當陽·불괴두당양)
위 시는 이식(李植·1584~1647)이 선조 임금의 부마(駙馬·임금의 사위) 박미(朴瀰·1592~1645)가 세상을 뜨자 지은 만사 ‘금양위만 2수(錦陽尉挽二首)’ 중 첫 번째 작품으로, ‘택당집속집(澤堂集續集)’ 권 6에 수록돼 있다.
박미는 또한 선조의 원비 의인왕후의 외손이기도 하다. 1603년(선조 36) 선조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다. 그는 재주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부마는 과거 응시와 정치 참여가 불가하였다. 그렇기에 그가 지은 자찬묘지인 자지(自誌)에서 한유의 말을 인용해 자신은 글이나 지으며 한평생 살려 했다고 썼다. 이식도 위 시에서 박미가 문학에 재능이 뛰어났지만 영욕의 자리에서 초월할 수밖에 없어 뜻이 꺾이고 말았던 것을 애석해했다. 그는 부마라는 화려한 명예를 지녔지만 생활은 무척 검소했던 것 같다. 송시열이 지은 박미 비문에 따르면, 자손들은 춥고 굶주림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박미가 죽고 난 뒤 효종은 옹주의 가난을 걱정하여 박미의 아들 세교(世橋)를 특별히 군수에 임명했을 정도였다.
일곱째 구의 ‘은택표(恩澤表)’는 ‘한서(漢書)’에 나오는 ‘외척은택후표(外戚恩澤侯表)’ 준말로, 국구(國舅·임금의 장인)나 부마 등을 가리킨다. 여덟째 구 ‘두당양(杜當陽)’은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진 진(晉)나라 부마 두예(杜預)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 박미의 부친 박동량은 인목대비 폐위 때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일곱 신하에 속했다는 이유에서 죄를 입었다. 이식의 시편을 읽다가 박미에 대한 내용이 있어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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