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축하 난’ 정쟁

안홍욱 기자 2024. 8. 20.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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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2년 8월30일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축하 난을 들고 예방한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과 인사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때에 따라 어울리는 꽃이 있다. 어버이날에는 부모님 옷깃에 달아드리는 카네이션이 있고, 성년의날을 맞은 이들에겐 열정과 사랑을 담은 장미를 선사한다. 사회생활에서 승진, 영전, 취임, 개업 등을 축하할 땐 난(蘭)이 보편적이다. 동양란은 지조·절개, 서양란은 아름다움·행운 같은 꽃말을 갖는다. 주는 이들이 이런 뜻까지 헤아려 고르진 않았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난 선물은 관행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정치권에서도 축하용으로 난이 애용된다. 대통령이나 정당 대표들은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누군가를 직접 보내 난을 전달한다. 그런 점에서 난의 ‘정치 꽃말’은 소통일 수 있다. 1997년 5월 김영삼 대통령은 정무수석을 보내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의 대선 후보 선출을 축하하는 난을 전달했다. 1987년 후보단일화 실패, 1992년 대선 맞대결 등으로 불편했던 두 사람 사이에 난이 화해의 메신저가 됐다는 말도 나왔다. 2016년 2월 김종인 민주당 비대위원장이 비서실장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64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난을 보내려 했지만 정무수석이 세 차례 거절했다 뒤늦게 받은 것은 당시 정국의 ‘불통’ 기류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윤석열 정부에서 난이 수난을 겪고 있다. 윤 대통령이 지난 5월 말 22대 국회의원 300명 전원에게 ‘국회의원 당선을 축하합니다’란 글귀가 적힌 난을 보냈으나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거부권을 오남용하는 대통령의 축하 난을 정중히 사양한다”며 수령을 거부했다. 조 대표는 지난달 대표로 재선출된 뒤에는 홍철호 정무수석이 들고온 윤 대통령의 축하 난을 받았다.

이번엔 민주당과 대통령실이 축하 난을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지난 19일 홍 정무수석이 연임한 이재명 대표에게 대통령 명의 축하 난을 전달하려고 수차례 연락했지만 민주당이 답을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정무수석의 이 대표 예방 일정을 조율 중이었지만 축하 난 전달과 관련해선 어떤 대화도 나눈 바 없다”고 맞섰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느닷없는 ‘축하 난 진실 공방’은 한국 정치의 살풍경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에게 금란지교(金蘭之交·우정 어린 친구)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인 매너는 갖춰져야 정치가 작동할 것 아닌가.

안홍욱 논설위원 ah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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