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벌 해체 후 첫 선거...거론되는 후보만 10여명
70대 가미카와부터 40대 고이즈미까지
여론조사 1위 이시바 前간사장, 5번째 도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집권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포스트 기시다’를 노리는 잠룡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해 말 불거진 자민당 파벌 비자금 스캔들로 파벌 해체가 진행된 후 첫 당 총재 선거로 이미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만 10여명이다. 2000년 이후 총재 선거가 5명 이하 후보 간 경쟁 속에 치러진 것을 감안하면 난립 양상이다.
20일 아사히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등에 따르면 자민당은 이날 선거관리원회를 열어 총재선거 일정을 결정했다. 투표일은 다음달 27일이다. 내각제인 일본은 다수당대표가 총리가 된다.
고바야시 다카유키(49) 전 경제안보상이 이날 가장 먼저 출마를 선언했고, 2021년 총재 선거 때 높은 여론 지지에도 당내 지지를 확보하지 못해 기시다 당시 후보에게 패배했던 고노 다로(61) 디지털상은 일찌감치 출마를 기정사실화했다. 이번이 다섯 번째 도전인 이시바 시게루(67) 전 간사장은 22일 지역구 돗토리현에서 출마선언을 할 것으로 전해졌다.
닛케이는 “후보자로 10명 이상이 거론된다”면서 “빨리 출마를 표명해 언론 노출을 늘려 지명도 부족을 보완해 간다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이 외에도 가미카와 요코(71) 외무상, 다카이치 사나에(63) 경제안보상, 고이즈미 신지로(43) 전 환경상, 모테기 도시미쓰 자민당 간사장(68) 등 10명 가량이 출마할 것으로 예상된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는 인물은 이시바 전 간사장이다. 일본 혼슈 돗토리현이 정치적 기반(중의원 12선)인 이시바 전 간사장은 게이오대를 졸업한 후 29세 최연소 나이로 정계에 진출해 고이즈미 내각에서 방위상, 지방창생상을 지냈다. 그는 2008년부터 네 차례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 지지 세력이 부족해 매번 패배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정적’으로 당 내 세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른바 ‘비자금 스캔들’이 터지면서 이시바 전 간사장의 입지가 달라졌다. 아사히신문은 “자민당이 ‘비자금 스캔들’로 홍역을 치른 뒤 파벌 해산을 결정한 상황에서 무파벌인 이시바 전 간사장을 중심으로 세력이 모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총재 후보 가운데 가장 ‘친한파’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극우 색채가 강한 자민당 중의원들에 비해 합리적 보수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고노 디지털상은 자민당 내 주요 파벌인 ‘아소파’ 수장으로 당내 입지가 높은 인물이다. 아소파는 아소 다로 부총재를 중심으로 구성된 자민당 내 세력으로, 의원 50여명이 소속돼 있다. 1963년생인 고노 디지털상은 1996년 중의원 선거에 처음 당선돼 외무상, 방위상 등을 지냈다.
고노 디지털상은 1993년 일본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관여를 처음으로 인정한 ‘고노 담화’의 주체인 고노 요헤이의 아들이다. 다만 한국에서 고노 디지털상은 2019년 외무상을 맡았을 때 강제 징용 문제에 강경 입장을 내놓아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 그해 7월 징용 배상 판결 문제를 다룰 중재위원회 구성에 한국 정부가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관표 당시 주일한국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40대 ‘젊은 정치인’ 후보 중에는 고이즈미 전 환경상, 고바야시 전 경제안보상이 있다. 고이즈미 전 환경상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으로 아버지의 비서로 일하면서 정계에 발을 들였다. 소속 의원이 98명인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아베파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잇따른 망언으로 정계에서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올랐다. 2019년 유엔 기후변화정상회의에서 “기후변화 문제를 대할 때는 즐겁고 쿨 하고 섹시해야 한다”고 말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에 대한 편견을 없애겠다며 해당 지역에서 광어회를 먹고, 서핑을 해 화제를 모았다.
고바야시 전 경제안보상은 2012년 중의원 선거에 당선된 후 방위정무관 등을 역임했다. 2021년 기시다 내각이 출범할 때 40대에 경제안보상을 맡으며 주목받은 인물이다.
여성 후보인 다카이치 경제안보상은 ‘리틀 아베’로 불릴 정도로 우익 강경파 정치인으로 알려졌다.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단골로 참배한 이력도 있다.
블룸버그는 “다카이치가 총재가 될 경우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우려되며, 중국과의 관계도 더욱 악화할 수 있다”고 전했다.
다카이치 경제안보상은 올해 초부터 자신의 지지세력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해 자민당 내에서 ‘일본의 힘 연구회’라는 스터디 모임을 설립해 총재 선거의 발판을 다졌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보수 성향 당원들에게 다가갔다.
이 외에도 법무부 장관 격인 법무상을 세 차례 지낸 가미카와 외무상도 유력 후보로 꼽힌다. 그는 국회 연설에서 여러 차례 “역사적 사실에 비춰 봐도, 국제법상으로도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17일 교도통신은 가미카와 외무상이 기시다 총리에게 출마 의사를 알렸다고 보도했다.
모테기 간사장도 차기 총재 선거를 염두에 두고 각종 의원 행사에 참석하며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 모테기 간사장은 일본은행(BOJ)에 대해 “금융정책을 정상화한다는 방침을 좀 더 명확하게 내세울 필요가 있다”며 금리인상을 압박한 바 있다.
이들 후보는 자민당 국회의원 372명 중 20명의 추천인 서명을 받아야 한다. 추천인 서명은 신중한 정치 행위로, 현재 20명을 모을 수 있는 후보는 고이즈미 전 환경상, 고노 디지털상 등 일부에 불과하다고 닛케이는 전했다. 닛케이는 “추천인을 충분히 모으지 못하고 출마를 포기하는 의원도 있을 것”이라며 “누가 출마를 포기하는냐,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와 기시다 총리가 어떤 후보를 지지하느냐가가 선거 구도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후보가 없기에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 후보는 역대 최고의 혼전이 예상된다. 추천인 20명이 확정된 후 입후보자가 가장 많았던 해는 2008년과 2012년으로, 당시 후보자는 5명이었다.
한편 자민당은 이번 총재 선거로 비자금 스캔들로 얼룩진 당 이미지 쇄신을 노리고 있다. 닛케이는 “자민당은 파벌 정치자금 문제로 지지율이 낮은 가운데 총재 선거에서 정책 토론을 통해 정권 운영능력을 보여주고 이미지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빛나 기자
binn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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