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드골 망명정부 역사로 본 건국절 논란[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최근 반쪽짜리 광복절 기념식을 계기로 해묵은 ‘건국절 논란’이 다시 불붙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을 임정 수립일인 1919년 4월 11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로 볼 것인지를 놓고 이명박 정부 때 불거진 건국절 논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임시정부 혹은 망명정부는 근현대를 통틀어 전 세계에 약 80여 개가 있었습니다. 드골 망명정부 등 다른 역사적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 임정의 의미를 짚어 보겠습니다.
나라 뺏기고도 ‘전승국’ 인정받은 드골 망명정부
17세기 국제 법학자 그로티우스(H. Grotius)는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군주가 바뀌어도 국가는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봤습니다. 예컨대 역성혁명으로 고려 왕조가 조선으로 대체됐어도 민족국가로서의 일체성은 유지된다고 보는 시각과 같습니다. 이런 논리를 확장하면 외세의 침입으로 당장 주권을 잃더라도 민족국가 자체가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죠. 임시정부 혹은 망명정부의 정치적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임시정부나 망명정부가 국제사회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드골 망명정부와 티벳 망명정부의 차이가 대표적입니다. 독일 나치에 맞서 영국 런던에서 활동한 드골 망명정부(자유 프랑스)는 연합국과 공동으로 군사 작전에 나서는 과정을 거쳐 전후 전승국으로서 베를린 분할 점령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반면 티벳 망명 정부는 수장인 달라이 라마의 노벨평화상 수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죠. 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요.
가장 큰 차이는 국제정치에서 역학 관계입니다. 드골 망명정부가 활동한 2차 대전 당시에는 독일 나치라는 공동의 적이 있어 연합국의 승인과 지지를 얻어내기에 용이했습니다. 반면 티벳 망명정부가 맞서고 있는 중국은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자, 미국과 더불어 G2로 분류되고 있는 강대국입니다. 이에 따라 자국의 정치, 경제적 이익이 우선인 각국이 중국의 눈치를 보며 티벳 망명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눈물 머금고 자국 함대 공격한 드골
그런데 1943년 7월 캐터펄트 작전(Operation Catapult) 당시 드골이 처칠의 요청에 따라 비시 프랑스 정권 휘하의 자국 해군 함대를 공격한 이후 상황은 달라집니다. 드골이 런던에 도착한지 3주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드골로서는 자국인들을 대상으로 총을 쏴야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고뇌를 안겨줄 수밖에 없는 작전이었죠.
하지만 막강한 전력을 갖춘 프랑스 함대가 나치 수중에 들어가면 연합국으로선 큰 손실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드골은 영국군과 함께 알제리 오랑에 주둔해있던 프랑스 함대 공격에 동참합니다. 이후 1944년 드골 망명정부는 미국, 영국, 캐나다, 소련 등 연합국들로부터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 역사가 앤드루 로버츠는 자신의 책 ‘승자의 DNA’에서 “드골은 평생 이 작전을 자신의 가장 어두운 역사로 깊이 새겨두었다. 하지만 이 작전 이후 드골은 처칠에게서 진정한 동지 대우를 받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임정도 드골 망명정부처럼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줌으로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윤봉길 의거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장제스는 “중국의 40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임정에 군사, 재정적 지원을 해줬죠. 1945년 4월 4일에는 임정과 국민당 정부가 ‘광복군 통수권은 임정에 있고, 재정 원조는 차관으로 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맺기에 이릅니다. 이는 카이로회담에서 장제스가 한국 독립을 언급하는 배경이 됩니다.
국제사회 승인 위한 임정의 치열한 외교전
이에 따라 당시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은 1921년 3월~1922년 1월까지 약 1년간 267개 미국 신문에 게재된 1009개의 한국 관련 기사들을 수집합니다. 미국 정부의 외교 방침을 명확히 이해하고 현지 언론을 외교전에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었죠. 또 한국 독립문제를 미 의회에서 다룬 바 있는 토마스 찰스 전 상원의원 같은 정계 인사를 특별고문으로 영입합니다.
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목표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미 정부가 1차대전 승전국인 일본을 의식한 탓에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한국 문제가 공식 의제로 다뤄지지도 않은 겁니다.
하지만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한일병합이 한국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이루어졌고, 일본의 식민 지배는 한국에 혜택을 주었다’는 일본 주장에 맞서 “한일병합은 강제로 이뤄졌고, 한국인들은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임정의 입장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TV가 없던 시절 신문의 대중 영향력이 컸기에 독립 외교에서 의미 있는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됩니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열린 1933년 국제연맹 특별회의에서 임정 외교전은 워싱턴회의 때보다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때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미국과의 대립 구도가 확연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미일 갈등이 심화되면서 일본 대륙 침략의 교두보인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재평가될 수 있었죠.
이승만은 이런 미일 간 균열을 독립 외교에 활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승만은 국제연맹 회의가 열린 제네바로 출국하기 직전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의 아시아 대륙 침략 문제는 열강들의 보장 하에 완충국 한국이 정상적인 위치로 회귀 되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10여년 전 워싱턴회의 때만 해도 임정을 푸대접한 미국 정부의 태도가 이때는 180도 바뀐 사실입니다. 미국 체류 당시 무국적 신분이던 이승만에게 외교 여권을 발급해준 데 이어 제네바 주재 미국 영사(길버트 프렌티스)가 각국 대표들을 소개해주고 국제연맹 사무국의 정보도 알려줍니다.
이뿐 아니라 이승만이 만든 외교 문건을 검토해주고, 그의 편지를 미 국무장관 및 소련 대표단에 전달해주기도 하죠. 이 같은 미국의 변화는 앞서 말한 미일 대립 구도가 본격화된 데 따른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임정은 만주 거주 한인들의 피해를 호소하고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1933년 2월 22일 국제연맹 특별회의에서 공식 회람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1931년 만주사변이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 문제를 이슈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입니다.
지금까지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보면
-정부 형태가 바뀌어도 국가는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국제법 원칙과,
-캐터펄트 작전 당시 눈물을 머금고 비시 정부 휘하의 프랑스 함대를 공격한 드골이 연합국의 승인을 얻어낸 것처럼
-대한민국 임정도 윤봉길 의거와 치열한 외교전 등을 통해 중국 등의 지지와 승인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임정의 존재를 폄훼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단순히 민족주의적 감정이 아니라, 팩트들이 가르치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고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참고 문헌]
-김태원 〈국제법상 망명정부의 승인에 관한 연구〉 (국제법학회논총 64권 2호, 2019년)
-김정민 등 〈만주사변 발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연맹 외교: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2019년)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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