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넝쿨에게서 배운 것 [소소칼럼]
지난 주말, 정오의 땡볕에 달궈진 철로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때였다. 비둘기 한 마리가 1호선 온수역 철로에 내려앉았다. 몇 걸음 안 가 비둘기는 철로와 승강장 틈새로 몸을 숨겼다. 50㎝도 채 돼 보이지 않는 틈에서 그늘을 찾은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양주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가 울려 퍼졌다. 비둘기는 승강장 코앞으로 열차가 몸을 들이민 순간까지도 틈새를 떠나지 않다가 간발의 차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마터면 열차에 치일 뻔했는데, 비둘기는 태연히 역사 위 전깃줄에 걸터앉아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닌 듯싶었다. 올여름 한 점 그늘을 찾기 위해 새들은 몇 번이나 생을 걸고 틈새를 찾아 헤맸을까.
그늘이 간절한 여름이 오기 전까지, 나는 틈새의 효용을 미처 몰랐다. 수년 전 겨울의 일이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담벼락에 달라붙은 넝쿨을 제거해 달라”는 민원이 들어온 적 있었다. 주민회에선 넝쿨 가지가 창문에 들러붙는 직접적인(?) 피해를 보는 1층 가구들이 함께 해결할 일이란 결론을 내렸다. 동마다 1층에 사는 집들이 십시일반 돈을 보태 사설 업체를 불러 아예 넝쿨을 뿌리째 뽑기로 작정했는데, 1층 가구원 가운데 최고령 노인인 우리 할머니만 극구 말렸다. “갱신히(‘간신히’의 충청도 사투리) 붙어 있는디 부러 떼 내지 말라”며.
최고령 할머니의 한마디를 차마 꺾지 못했던 아파트 1층 주민들은 결국 우리 집 담벼락만 쏙 빼놓고 나머지 넝쿨의 싹을 모두 뽑아냈다. 그때의 나에게 ‘넝쿨 뽑기’는 그러거나 말거나 무관심한 일에 속했다. 다만, 할머니의 고집으로 아파트 주민들에게 괜한 폐를 끼친 건 아닌지 조심스러웠을 뿐이었다.
1층 살림을 누가 밖에서 들여다볼까 싶어, 거실부터 방까지 커튼 치고 사느라 잊고 지냈던 넝쿨의 존재를 깨닫게 된 건 1년 반 뒤 여름. 창문을 에워싼 넝쿨 사이사이마다 주황빛 능소화가 한가득 피어났다. 그동안 한 번도 피워낸 적 없던 첫 꽃을 피워낸 거였다. 우리 집 창문과 방음벽 사이 1m 남짓한 틈새에 뻗친 넝쿨 그늘로 새들이 드나들며 한낮의 땡볕을 피했다. 초록이 우거진 넝쿨 덕에 한여름엔 커튼을 치지 않아도 되는 건 덤이다.
검색해 보니 넝쿨은 ‘그 자체의 힘으로는 서지 못하고 다른 식물이나 물체에 의지하면서 자라는 식물 줄기’라 한다. 식물과 물체뿐일까. 살아남으려면 사람의 힘도 빌려야 할 것이다. 할머니의 말처럼 여러 존재의 힘을 빌려 ‘갱신히’ 자라난 넝쿨은 새를 비롯한 다른 동식물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준다. 한낮의 땡볕에서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도록. 그러면 힘을 빌려야 했던 작은 넝쿨은 다른 생명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된다.
할머니는 3년 전 돌아가셨지만, 어김없이 돌아오는 여름마다 할머니가 애써 지킨 넝쿨 정원을 누리고 있다. 창문 밖을 포위한 넝쿨을 보고 있자면 넝쿨이란 틈새를 만드는 식물임을, 그해 겨울 할머니가 지킨 것은 넝쿨보다 더 큰 ‘틈새’라는 시공간임을 깨닫게 된다.
비단 내 집 앞뿐일까. 여름은 벌어진 틈을 채우는 계절. 쪼개진 아스팔트 도로 틈에 자리한 조금의 흙 속에서도 싹이 튼다. 풀이 우거진다. 틈새에도 삶이 피어난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여름이었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4명의 기자가 돌아가며 씁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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