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 드넓은 인권의 세계를 보다

한겨레 2024. 8. 2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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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16화 유엔세계인권대회
냉전 붕괴 뒤 국내 정세도 급변…‘변혁운동’ 내적 질문 커져
유엔세계인권대회 성소수자·선주민·이주민 이슈 즐비
“이 모든 게 인권문제라니…” 인권운동 새 지평 눈 뜨는 순간
1993년 6월 유엔세계인권대회 참가자들이 ‘스톱 디스어피어런시스’(Stop Disappearances·사람들의 증발을 멈춰라)라고 적힌 펼침막을 내걸고 행진하고 있다. 필자 제공

1991년 이후 우울한 나날들을 보냈던 것 같다. 그해 7월에 강경대 치사 사건 첫 재판이 열렸을 때 유가족들이 법정소란을 일으켜서 박정기, 강민조(강경대의 부친) 회원이 구속되고, 오영자(박선영 모친), 이오순(송광영 모친) 회원이 수배되는 일이 일어났다. 흥분하시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강경대를 죽인 경찰을 보자 유가족들은 즉각적으로 흥분했던 것이다.

1991년 분신정국 이후 유가협에는 회원이 늘었다. 유가협 회원이 는다는 건 그만큼 새로운 죽음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해서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매년 열리는 범국민추모제 제단에 올라가는 영정 수가 늘어만 갔다. 나의 유가협 생활은 열사들이나 의문사 죽음을 쫓아다니고, 전국에서 벌어지는 추모제에 찾아다니는 일로 분주했다. 그러면서도 죽은 이들의 명예회복이나 진상규명을 위한 일들을 만들어가야 했다. 전국에서 흩어져 있던 열사들이나 희생자들의 추모단체, 기념사업회들의 연대기구가 범국민추모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져서 1992년 3월에 ‘전국 민족민주열사 추모(기념)사업회 연대회의’ 이름으로 창립하게 되었다.

1993년 6월, 나는 제4회 범국민추모제 준비로 바빴다. 범국민추모제를 준비할 때면 유가협은 언제나 분주했다. 1년 동안 다락에 올려놓은 열사, 희생자들의 영정을 내려서 손보는 일부터 했다. 파손된 액자 틀을 다시 맞추고, 먼지를 깨끗이 닦아냈다. 유가족들과 추모사업회 일꾼들이 정성껏 영정을 닦는 모습을 보고는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지쳐 있던 나의 첫 외국 출국

6월12일, 경희대에서 열린 제4회 범국민추모제는 잘 진행되었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날 대학생들은 남북 학생회담을 열기 위해서 연세대에서 집회를 한 뒤 판문점으로 향하던 중 연신내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진압을 하던 김춘도 순경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6월13일, 경희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범국민추모문화제 때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열사여, 일어나라’ 추모 문화공연은 망했다.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장대비 속에서 나는 속으로 울었다.

세계는 급격히 변했다. 냉전체제가 붕괴하였고, 국내에서는 김영삼-문민정부가 들어서서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등으로 김영삼 정부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뜨거웠다. 대학생들은 통일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고, 노동운동도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서 나는 유가협의 울타리 안에서 머물러 있었다.

‘내가 하는 운동이 변혁운동인가? 정말 지금 나는 옳게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도 들었다. 누구 하나 그에 대한 답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추모문화제를 정리도 못 하고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유엔세계인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김포공항에 아내가 갓 백일 지난 큰딸 성아를 안고 배웅 나왔다.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딸과 아내를 뒤로하고 나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했다.

유엔은 냉전체제가 붕괴한 뒤 매년 주요한 의제들을 다루는 세계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1992년 리우환경회의, 1994년 북경여성회의 같은 식이었다. 1993년에는 인권회의였다. 빈에서 열리는 인권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 한국의 인권단체들은 ‘유엔세계인권대회를 위한 민간단체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준비해왔다. 거기에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가협, 민주주의법학연구회, 국제노동기구(ILO) 전국노동자공대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의 인권단체들이 참여했다. 본 대회는 6월14일부터 25일까지 열렸고, 그전에 6월10일부터 13일까지는 민간단체 포럼이 열린다고 했다. 나는 뒤늦게 합류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외곽 지역에 유엔사무국 국제회의장이 있었다. 대회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정부대표들, 유엔과 국제인권기구 대표들, 세계에서 몰려든 민간단체들로 북적였다. 세계에서 모인 민간단체 활동가들이 누구는 7천명이라고도 했고, 누구는 2만명이라고도 했다. 국제회의장 지하 1층은 세계 인권박람회였다. 그때 당시에 진행 중이던 보스니아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의 신발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것도 보았다. 저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때도 죽어가고 있었다. 그곳만이 아니었다. 세계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비롯한 끔찍한 인권유린이 진행되었고, 진행 중임을 알리고 있었다. 민간단체들이 모인 지하 1층의 분위기를 색깔로 말한다면, 핏빛이었다.

1993년 6월 유엔세계인권대회에서 아르헨티나의 ‘오월광장 어머니회’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이들은 군부독재에 저항하고 세계 인권문제에 연대해왔다. 필자 제공

핏빛과 핑크빛의 유엔세계인권대회

그다음의 빛깔은 핑크빛이었다.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서만 살아온 나는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 동성애자들을 만났다. 복장도 이상했다. 복장부터 충격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엉덩이가 나오는 옷을 입고 춤을 추기도 했고, 남남, 여여가 붙어 다니면서 키스를 했다. 그들이 나눠주는 모든 유인물은 핑크빛이었다. 그 외에도 여성, 장애인, 선주민(원주민), 이주민 등 소수자들의 이슈도 많았다. 인권 범위의 광대함에 놀랐다.

그 앞에서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우리가 알던 인권과는 너무 달라. 이 모든 문제가 다 인권문제라니.”

그곳에서 이철규추모사업회 황차은 국장과 나는 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상대로 의문사 진상규명 서명을 받아갔다. 서명지는 연세대학교에서 영어 강사로 있던 진영종 선배(현재 참여연대 공동대표)가 만들어주었던 것을 사용했다. 독일에서 온 양영미씨(그는 나중에 참여연대에서 국제연대 담당자가 된다)가 영어가 안 되는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다. 우리는 아르헨티나에서 오신 ‘오월광장 어머니회’ 분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남미에서는 친미 군부독재 정권들이 들어섰고, 미 중앙정보국(CIA)의 배후조종을 받아가면서 ‘더러운 전쟁’(Dirty War) 시기를 거쳤다. 이 시기에 각국에서는 수천에서 수만명이 납치되어 고문당하고, 실종되었다. 오월광장 어머니들은 군부독재하에서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을 돌려 달라며 대통령궁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흰 스카프를 두른 백발의 어머니들은 단단했다. 그들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국가폭력에 항의하고,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있었다.

1993년 6월 유엔세계인권대회에서 행진을 시작하기 전 무대 모습. 필자 제공

대회 기간에 행진이 있었다. 도나우 강가를 따라서 행진을 벌였고, 우리도 참가했다. 그때의 주제는 “스톱 디스어피어런시스”(Stop Disappearances·사람들의 증발을 멈춰라)였다. 디스어피어런시스는 미싱(missing·실종)보다 더 넓은 의미다. 세계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고, 국가에 의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살해되는 일을 중단하라는 호소였다. 사라진 사람들을 의미하는 사람 모양의 검은색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나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사라진 사람을 의미하는 피켓을 들고 행진에 참여했다.

1993년 6월 유엔세계인권대회가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사라진 사람들을 의미하는 검은색 사람 모양의 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박래군(가운데)과 황차은 이철규추모사업회 국장(오른쪽)의 모습. 필자 제공

0.75평 감옥에 놀라는 사람들

한국의 민간단체 활동은 다른 나라 활동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0.75평의 감옥 모형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감옥 모형 안에 들어가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이렇게 좁아요? 여기서 어떻게 살아요?” 그렇게 묻는 그들에게 여기서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30~40년 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너무 놀라워했다. 그 모형은 뉴욕의 재미한국청년연합 사람들이 목재로 만들어서 공수해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재미한국청년연합은 5·18 때 미국으로 밀항한 윤한봉 선배가 미국 현지에서 조직한 단체였다. 그들은 풍물도 칠 줄 알았다. 한국 대표단이 퍼포먼스를 할 때는 이들이 앞장서서 풍물을 쳤는데, 풍물은 사람들을 모으는 데 효과가 좋았다.

나는 실종(missing), 고문(torture)이란 키워드가 들어있는 자료들을 열심히 모았다. 우리나라 의문사에 해당하는 영어는 따로 없었다. 비슷한 개념의 자료들을 열심히 모았다. 그때 마구잡이로 모았던 자료들이 나중에 한국에서 유용하게 쓰일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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