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나의 배터리ON] 전기차 완충 금지는 21세기판 `붉은 깃발법`

[편집자주] '박한나의 배터리ON'은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배터리 분야의 질문을 대신 해드리는 코너입니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을 비롯해 배터리 밸류체인에 걸쳐 있는 다양한 궁금증을 물어보고 낱낱이 전달하고자 합니다.
"'붉은 깃발법(Red Flag Act)'. 최근 자동차와 배터리업계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입니다. 이 법은 기술의 진보를 막는 규제가 어떻게 한 나라의 산업 지형을 뒤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인데, 오늘날 전기차 시대에 다시 언급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영국은 1865년 세계 최초로 도로교통법 중 하나인 '로코모티브 법'(Locomotive Acts), 일명 '붉은 깃발법'을 제정했습니다. 자동차 시대의 개화와 함께 불거진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법안입니다.
붉은 깃발법으로 자동차의 최고 속도는 시골 지역에서 시속 6.4㎞, 도시 지역에서 시속 3.2㎞로 제한됐습니다. 또 차량 앞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도보로 경고하는 사람을 둬 자동차의 접근을 알리도록 했습니다.
붉은 깃발법은 영국의 자동차 산업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지금까지 받습니다. 영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자동차 산업을 시작했음에도 자동차의 속도 제한과 붉은 깃발을 들고 경고하는 인원을 두는 등 과도한 규제로 영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은 더뎌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붉은 깃발법이 도입된 1865년부터 폐지되는 1896년까지 약 30년 동안 미국과 독일에 밀려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을 내주게 됐습니다. 영국의 시대착오적인 붉은 깃발법 하나가 세계 자동차 산업 지형을 뒤바꾼 셈입니다.
요즘 자동차와 배터리 업계에서 또다시 붉은 깃발법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전기차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 무차별적으로 확산하면서 설익은 정책들이 나오고 있어서입니다.
서울시는 지난 9일 전기차 화재 방지 대책으로 일명 '완충 금지 조치'를 내놨습니다. 인천 청라 전기차 화재 사고가 발생한 지 3일 만이었습니다. 연이어 충남도와 포항시 등 주요 지자체들도 여기에 동참해 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을 개정해 아파트 등 공동주택 지하주차장에 90% 이상 충전한 전기차의 출입을 금지하는 게 골자입니다.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은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지자체에서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을 개정하면 해당 지역 내 공동주택에서 이를 반영하는 만큼 실질적인 정책 효과를 가집니다.
시민의 불안감에 발 빠르게 대응하겠다는 의도였지만 반응은 예기치 않은 모양새입니다. 내연기관차 사용자들과 전기차 사용자들 간 불화만 심화하고 있습니다.
전기차 커뮤니티에서는 "충전을 단속할 수 있냐", "폰 배터리를 80%로 맞추는 것이랑 같은 느낌", "당장 전기차 충전 90% 제한 논의 중인 공무원들은 핸드폰과 태블릿, 노트북 충전부터 90% 이하로 차단하라", "89% 충전과 90%의 차이는 뭐냐"는 등의 반응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가솔린 차량 등 인화물질 탑재로 주거지역 복귀 시 전량 소진", "내연기관차 12V 저전압 배터리 완충 금지" 등의 패러디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로 지적되는 부분은 이미 기술로 구현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조치라는 점입니다. 전기차 제조사들은 차량에 3~5%의 안전마진을 설정해 둡니다. 계기판에 '충전율 100%'라고 표기돼도 실제로는 95~97%만 충전되도록 설정하는 것입니다.
전기차의 이상신호를 감지하는 BMS(배터리매니지먼트시스템)에는 과충전을 원천 차단하는 기술이 이미 내재돼 있습니다. 현대차·기아의 경우, 차량에 BMS와 충전 제어기가 장착돼 충전량이 정해진 범위를 초과하지 않도록 관리합니다. 두 시스템 모두 고장나면 독립된 물리적 차단 장치가 추가로 작동합니다. '과충전에 의한 문제 가능성은 0%에 가깝다'고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전기차 매뉴얼과도 상반됩니다. 전기차 제조사들은 월 1회 이상 20%에서 100%까지 완충을 권고합니다. LFP 배터리를 쓰는 테슬라는 주 1회 완충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배터리팩을 구성하는 수많은 셀은 충전 시 전압 차가 발생해 불안정해지는데 이 차이를 균일하게 바로잡아주는 '셀 밸런싱'이 필요해서입니다.
특히 테슬라 등이 쓰는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는 완충 상태에서만 셀 전압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LFP 배터리는 충전과 방전 과정에서 전압 곡선이 상대적으로 평탄하기 때문입니다. 완충 상태에서 셀 전압을 조정함으로써 배터리 팩의 안정성과 수명을 최적화할 수 있습니다. 일부 지자체들이 이 같은 기술적인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부랴부랴 섣부른 규제부터 발표한 셈입니다.
정부의 '뒷북 행정'도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전기차와 관련된 안전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정부가 전기차 안전 관리에 필요한 조치를 제때 마련하지 않고, 문제가 발생한 후에야 뒤늦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순 없습니다.
여러 부처에 전기차와 배터리, 충전기 등 업무가 나눠 있어 종합적이고 일관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됩니다. 뒤늦게 국무조정실을 전기차 안전 컨트롤타워로 지정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현재 추진 중인 전기차 배터리 안전성 인증제를 포함해 전력선통신 모뎀 장착 기기 확대 등은 기술 중복 여부와 실효성과 필요성, 비용 효율성 등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 전기차와 배터리업계는 이미 화재 방지 기술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정부나 지자체의 규제가 자칫 과도하거나 불필요할 결과로 이어질 경우 영국의 과거처럼 한국의 산업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한 국내 배터리 업체 관계자는 "경영진은 사업 초기부터 한 건의 사고가 산업계 전반의 명운을 가를 수 있다고 안전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습니다"라며 "업계가 화재 안전성이 높은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에 대한 연구와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배터리 업체 관계자는 "전기차 사용자를 편 가르고 불안감을 심화하는 설익은 정책은 21세기 전기차 산업에서 한국이 쌓아 올린 금자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라며 "글로벌 배터리 톱5위 중 3사가 한국 기업인데, 자동차 종주국의 위상을 스스로 내팽개친 영국의 붉은 깃발법의 과오를 되풀이해선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박한나기자 park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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