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광해우(光海雨)
2024년 8월7일 오전 10시30분 제관들이 임시텐트에서 나와 묘역을 향해 발을 떼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제향이 진행되는 1시간 남짓 줄기차게 퍼붓다 집례제관이 예필(예식을 마침)을 외치자 그쳤다. 그리고 하늘은 다시 파랗게 변했다. 경기 남양주시 광해군묘에서 거행된 광해군 383주기 기신제향일의 날씨다.
'칠월이라 초하룻날은, 임금대왕 관하신 날이여, 가물당도 비오람서라. 이여∼ 이여∼.'
1641년 음력 7월1일 유배지 제주에서 67세로 광해군이 승하한 날 맑던 제주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비를 내렸다고 한다. 이후 제주 사람들은 음력 7월1일 제주도에 내리는 비를 광해우(光海雨)라 부르고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왕을 기억하며 이 민요를 불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즉시 평양으로 피란했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오자 다급해진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하면서 조정을 둘로 나누고 미워하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 분조를 맡겼다. 사실상 '나는 도망갈 테니 네가 전쟁을 맡아라'였다. 18세 왕자는 임시조정을 이끌고 남쪽을 향해 전장으로 뛰어들어 군사를 모집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등 조정이 해야 할 일을 기대 이상으로 수행하며 현군의 모습을 보였다.
1608년 선조가 사망하자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됐다. 유일하게 조선팔도를 두 발로 다녀본 임금 광해는 안으로는 전후수습과 민생안정에 주력하고 밖으로는 중립외교를 통해 전쟁의 재발을 막았다. 그러나 전후수습을 위한 궁궐건축은 백성들의 반발을, 민생안정을 위한 대동법은 시범실시 지역인 경기도를 기반으로 한 서인들의 반발을, 중립외교는 사대주의 사림의 반발을 불렀다. 1623년 서인들은 '폐모살제'의 죄를 물어 쿠데타를 일으키고 능양군을 왕으로 세웠다. 인조반정이다. 집권 이후 '친명배금'을 외치던 인조와 서인세력은 급기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자초해 국토를 다시 피바다로 만들고 그들이 업신여기던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
광해군은 폭군인가. 정권을 찬탈한 세력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전 정권을 악의적으로 묘사하곤 한다. 고려가 편찬한 '삼국사기', 조선이 편찬한 '고려사',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고종실록' 등이 그렇다. 인조가 편찬한 '광해군일기'도 마찬가지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임금은 모두 인조의 후손이었다. 광해에겐 한 번도 복권될 기회가 없었다.
제향 참관을 마치고 나는 서울 도봉구에 있는 연산군묘로 향했다.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시호도 능호도 없이 연산군묘로 불리지만 광해군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듯하게 관리된다. 입구에는 관광안내소가 있고 4개 국어로 된 안내전단이 비치돼 있다. 제향준비 건물인 재실도 갖췄다.
그런데 광해군묘는? 광해군묘에 가려면 남양주의 영락교회 공원묘지를 거쳐야 한다. 공원묘지 내부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길가에 철책이 있고 출입문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문은 닫혀 있다. 방문을 원하는 사람은 사전에 서면으로 신청하고 심사를 통과하면 사릉관리소 직원이 동행해 문을 열어준다고 한다. 그 문을 열고 좁은 길을 따라 100m쯤 내려가면 웬만한 일반인 묘쯤으로 보이는 광해군과 부인 류씨의 쌍분이 있다. 이것이 선조를 대신해 나라를 지킨 전쟁영웅의 묘인가.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천천히 하더라도 문화재로서 묘는 지금 즉시 정비해야 한다. 제절을 확장하고 잔디를 보강하고 산 아래쪽 부지를 확보해 주차장과 진입로를 만들고 홍살문과 재실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400년간의 위리안치'를 풀고 개방해야 한다. 명백한 폭군인 연산군의 묘만큼만이라도 신경써야 할 게 아닌가.
'바람은 흩뿌리는 비에 불어 성 모퉁이를 지나고….'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던 날 아침 광해군이 쓴 시의 첫 구절이다. 그날도 비가 내렸나 보다. (박동우 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박동우 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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