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칼럼] 고래인가, 새우인가?
강력한 군사력·소프트파워 G7에 초대받는 고래 국가
안에서는 분열·갈등·저주 난무… 분단 후 사상·이념 대립 고착화
결국 한 나라 정치는 국민의 수준… 어느 쪽으로 갈지 국민이 판결을
대한민국은 이번 2024 파리올림픽에서 세계 8위의 스포츠 강국으로 올라섰다. 독일·이탈리아·캐나다를 제친 순위다. 세계 순위를 따지자면 근자에 한국만큼 잘나가는 나라는 없다. 한국의 실질 국민총소득(GNI)은 3만6000달러를 넘어서 드디어 일본을 따라잡았다고 한다. 군사 면에서는 세계 6위의 강국이고 자동차·휴대폰·반도체·선박 등 여러 면에서 한국은 선두 그룹에 진입한 지 오래다. 세계의 바다에 떠다니는 대형 선박의 43%가 우리 조선소에서 만든 것이고, 탱크·항공기 등 군사 무기도 세계시장에서 인기가 높다. 지하철·공항 등도 세계 일류 수준이고 머지않아 세계의 원전 시장에서도 한국이 우뚝 설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우리가 특히 자부해도 좋을 것은 이런 성취가 불과 50년 내외의 기간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참혹하고 참담한 전쟁을 겪으면서, 또 남북으로 갈린 상태에서 이념적 분열에 시달리면서 그런 불운들을 딛고 일어서 해낸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국의 발전을 세밀히 관찰해 온 스페인 출신 학자 라몬 파체코 파르도(영국 킹스칼리지 교수)는 2023년에 출간한 ‘새우에서 고래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날 한국은 더 이상 고래들 사이에서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다. (중략) 한층 강화된 민주주의 사회이자 세계에서 열 번째 경제 대국 그리고 여섯 번째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소프트파워의 차원에서 열한 번째 나라, 또한 언론 자유를 기준으로 아시아 최고의 국가이며, G20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고 G7에 초대받는 이 나라는 절대 피라미가 아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 책을 읽다가 눈을 현실로 돌리면 우리는 오늘날 이 시간 한국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열과 갈등, 증오와 저주가 난무하는 정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나라가 어떻게 건국됐는지를 80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정리하지 못하고 아직도 친일·반일 하면서 머리 터지게 싸우는 나라를 정말 제대로 보면서 하는 소리인가? 독일-프랑스처럼 수백 년을 원수처럼 죽이고 싸웠으면서도 손잡고 이웃하는 유럽의 학자가 무엇을 잘못 봤길래 아직도 친일, 죽창가 하면서 35년의 식민지 멘털리티에서 못 벗어나는 이 나라를 ‘고래’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국회를 보면 저질 정치의 극치를 본다. ‘180석’에 취해 이성이 마비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탄핵이니 특위니 하는 폭력적 언사가 일상이 되고 있다. 당대표 뽑는데 90% 가까이 찬성한다니 이 정당이 민주주의 정당인가 싶다. 지금 한국의 정치는 고래는커녕 새우라고 하기에도 창피할 만큼 타락하고 있다. 욕하는 것 보면 시정잡배도 저런 시정잡배가 없고 소셜미디어를 통한 비난의 정도는 도(度)를 넘는다.
나는 이 대립과 파괴적 언행들이 단순히 정치와 권력 추구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단 이후 고착화된 남북 대치에서 오는 사상과 이념의 대립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 대립의 뿌리에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지역 대립의 문제가 더 얹혀져 있다고 본다. 경제적 빈부의 차이에 대한 체질적 저항이 있고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좌우의 이념적 차이로 발전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념적 대립을 더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남북 분단이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는 빈부의 문제, 보수와 진보좌파의 문제, 지역적 차별 의식의 확대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이런 이념적 좌우 대립은 우리가 좀 잘살게 되면 마찰이 적어지거나 해소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보다 잘살게 되고 세계의 이목을 끌 만큼 발전하고 있음에도 그 대립은 줄어들기는커녕 더 악랄하고 더 저질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남들은 우리를 부러워하고 우리를 따라오려고 모방하고 우리를 배우려고 한국을 찾아오는데 우리 정치는 ‘너 죽고 나 죽자’는 돌격형으로 치닫고 있다.
학자들은 한 나라의 정치는 그 나라의 국민 수준이라고 했다. 그 말이 맞는다면 지금 이 나라를 ‘고래’로 일군 국민은 누구이고, 저질 정치를 가능케 해준 표(票) 쏠림은 어느 국민에게서 나온 것인가 헷갈린다. 이렇게 언제까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렇게 만든 것이 국민의 표심이라면 언제까지 나라를 한쪽으로 끌고 갈 것인지 판결을 해줘야 하는 것도 국민 몫이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하나의 나라로서, 하나의 국민으로 비로소 고래로 발돋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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