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광화문·뷰] “난 좌든 우든 믿지 않아, 성실한 놈만 믿어”
진영끼리도 편 가르며 악화됐지만
장대익·강준만 릴레이 칼럼 보며
지식인 소통, 희망의 씨앗을 본다
20년 전에 나온 작가 김훈(76)의 산문집 제목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다. 덧붙일 말이 별로 없다. 너는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내 편이냐 아니냐. 좋아지기는커녕, 악화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세월로 알고 있다. 종교보다 정치 성향 차이가 연애·결혼 불가의 1번 이유더라는 보건사회연구원의 4000여 명 면접 조사 결과가 최근 공개됐다. 이제는 같은 진영끼리도 누구 편이냐로 사생결단이다. 수박이냐 아니냐, 우리 팬덤이냐 아니냐, 밀정이냐 아니냐.
20년이 흘러 작가가 이번에 펴낸 산문집 제목은 ‘허송세월’. 그렇게 헛되이 시간만 흘러간 걸까. 이 주제만으로 일관한 책은 물론 아니지만, ‘적대하는 언어들’이란 제목의 짧은 글이 그 안에 있다. 주인공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임화(1908~1953)다. 일제강점기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최고봉. 서울이 고향이지만 그는 1947년 ‘사회주의 조국’ 평양으로 월북했고, 6·25 당시 인민군이 남하할 때 낙동강 전선까지 종군(從軍)한 확신범이다. 하지만 휴전 직후였던 1953년 8월 그는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사형당한다. 사회주의 조국에서 그는 ‘밀정’이었다.
작가가 인용한 임화의 시 두 편이 있다. 6·25 때 인민군이 불렀던 ‘인민항쟁가’가 그중 하나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강력한 이념성과 폭발적인 선동력. 두 번째 시의 제목은 ‘바람이여 전하라’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전쟁의 참화를 겪고 돌아와 평양에서 발표한 작품. ‘불붙는 휘발유와/ 쏟아지는 총탄 속을/ 집과 낫가리와 마을까지를 잃고/ 바람 속에 서 있는 어머니에게…’ 혁명에서 인간으로, 이념에서 어머니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에 그의 죽음은 예비되어 있었다고 작가는 건조하게 적는다. 더 이상 내 편이 아니었을 때, 임화는 후방 인민을 모욕하고 패배주의적 감정과 투항주의 사상을 유포한 인민의 적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보다 이념을 우선해야 생존할 수 있는 삶이라니. 신물이 난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캐묻기보다, 광복절이냐 건국절이냐를 따지기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먹고사는 문제 아니었던가. 오래된 거리처럼 뭉근히 사랑하고, 아이와 조금 더 놀아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하루하루가 인생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울한 이야기만 하고 싶지는 않다. 거대한 편 가름의 사회에서 극히 사소하고 순진한 반례일지 모르지만, 최근 색다른 칼럼 릴레이가 있었다. 장대익 가천대 교수의 8월 9일 자 조선일보 칼럼에 대해,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가 8월 14일 자 경향신문 칼럼으로 호응한 것이다. 주제는 이념이 아닌 일상. 도파민 유발하는 자극적 유튜브 생태계를 우려하며 좀 더 많은 지식인이 유튜브에 참여하자고 장 교수가 제안하자, 강 교수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지식인들이 유튜브 생태계로 쉽게 이주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적 혁신 이야기로 화답한 것이다. 문재인 정권 이후 진보 진영을 주로 비판한 강 교수는 요즘 그 진영의 극단주의자들에게 ‘배신자’로 비난받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네 편 내 편’의 선봉이었던 논객 강준만을 떠올리면 아이러니지만, 지적 게으름과 지적 불성실로 여전히 너는 누구 편이냐만 묻고 있는 나태한 지식인들보다는 희망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나는 문득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시인 신경림(1935~2024)의 말을 떠올렸다. “나는 좌든 우든 믿지 않아. 성실한 놈만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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