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대홍수 지역의 북한 비밀갱도
피해가 가장 심할 것으로 예상되는 평안북도 산간지역은 피해 여부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홍수가 발생한 7월 27일 신의주의 하루 강수량은 126mm였는데, 평안북도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구성시엔 228mm가 퍼부었다.
이들 지역에는 군수산업시설이 몰려 있다. 특히 구성시에는 북한 군수공업의 핵심인 구성공작기계공장과 유일한 탄약공장인 95호공장, 군복 생산의 중추인 구성방직공장, 전자전연구소 등이 있다.
구성시는 고려 때 귀주대첩이 펼쳐졌던 장소로, 두 개의 강과 여러 골짜기가 합류한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거란군 10만 명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은 강감찬의 수공전 설화가 가능했다. 인공위성 사진으로 보면 골짜기를 따라 철길이 놓여 있고, 철길이 끝나는 지점마다 군수공장 갱도 입구들이 보인다.
이 가운데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핵심 서류가 보관된 비밀 갱도도 있다. 이 서류는 주민 관련 문서 원본인데, 태어나자마자 출신성분이라는 굴레를 씌우는 북한의 악명 높은 주민등록제도 관련 내용이 담겨 있다. 본인은 모르지만 평생 농민이나 광부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소상히 정리돼 있다.
북한 각 지역 인민보안서(경찰서)에서 관리하는 주민등록 서류는 이곳에 보관된 원본에 기초한 필사본이다. 인민보안서에서 주민등록 서류를 직접 관리했던 탈북민에 따르면 북한의 출신성분은 10년 전 기준으로 ‘기본군중’과 ‘복잡한 계층’, 두 부류로 나뉜다. 그 이전엔 ‘적대계급 잔여분자’라는 출신성분 분류도 있었던 것 같지만, 이를 복잡한 계층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주민등록 서류는 가로세로가 각각 약 15cm, 25cm인 100쪽 분량의 책에 할아버지부터 8촌에 이르는 다양한 정보가 수기로 수록돼 있다. 첫 페이지엔 사진과 생년월일, 출신성분, 사회성분 등이 기록돼 있다. 출신성분 아래에 다시 종교인, 교화출소자 등과 같은 수십 개 세부 분류가 적혀 있다. 각 페이지 맨 아래엔 ‘확인자’(특정인의 경력에 대해 진술한 사람) 다섯 명과 검증을 책임진 ‘요해지도원’(안전부 주민등록지도원)의 손도장 6개가 찍혀 있다.
이 탈북민의 증언에서 흥미로운 점은 서류엔 한국 친척의 행적도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사촌 형 아무개는 괴뢰군 대대장을 하다가 ○○년 전역해 △△년 미국 ××도시로 가족과 함께 이민을 갔다’는 식이다.
다만 한국 가족의 행적은 1990년 이전까지로 국한돼 있고, 그 이후 기록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1990년 이전에는 북한이 간첩을 통해 남쪽 주민등록 시스템을 자유롭게 열람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정보망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주민등록 서류는 1년에 한 번씩 업데이트된다. 그 과정에 뭔가 이상하거나 새로운 증언이 추가되면 비밀 열람권을 가진 극소수 담당자가 구성시까지 찾아가 원본 서류와 대조해 본다.
구성시의 원본 서류들은 광복 이후부터 보관돼온 것이라 누런 종이들이 태반이라고 한다. 쥐면 부스러질 것 같은 그 종이들이 북한의 신분 시스템을 지탱해 주는 핵심 정보 인프라인 셈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빨치산 시절에 친일조직인 ‘민생단’ 관련 문건들을 불태웠고, 민생단과 연루된 혐의로 고통받던 숱한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충성하게 됐다고 끊임없이 선전해 왔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였다. 김일성은 인민에 대해 낙인찍은 문서를 너무 좋아했다.
임진왜란 때 왕이 도망가자마자 경복궁에 쳐들어간 사람들은 노비문서부터 태웠다.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면 인민이 맨 먼저 달려가 불 질러 버릴 곳도 ‘현대판 노비문서’인 주민등록 서류 보관소일 것이다.
구성시의 물폭탄 소식을 듣자마자 군수공장보단 제일 먼저 주민등록 서류 보관 갱도가 떠올랐다. 그곳이 홍수에 잠기거나 산사태로 붕괴됐다면 김정은에겐 가장 뼈아픈, 복구 불가한 피해가 될 수 있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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