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류층 부상하자… 상류층 “회원 자격 엄격히” 사교클럽의 탄생[설혜심의 매너·에티켓의 역사]
기존 회원 추천 통해 신규 가입
“사업-청탁에 클럽 이용 안 돼”… 엄격한 규칙-에티켓 준수 요구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는 유럽 역사에서 ‘혁명의 시기’라고 불린다. 프랑스 혁명이 유럽 대륙을 뒤흔들었고, 영국에서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정치적 급진주의와 계급투쟁 등 새로운 사회적 역학관계가 도래했다. 이제 궁정이 권력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에서는 위축되어 가던 궁정에 대한 반대급부로 ‘소사이어티(Society·‘상류사회’ 혹은 ‘사교계’로 번역할 수 있다)’가 성장했다.》
소사이어티는 런던 상류층 엘리트의 배타적인 무리 혹은 공간을 뜻하는 말이다. 소사이어티 안에는 결속력이 훨씬 강한 작은 집단들이 존재했는데, 그런 집단들은 흔히 ‘세트(set)’라고 불렸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 웨일스 공이 이끌던 그룹은 그의 런던 자택 이름을 따서 말버러 하우스 세트로 불렸다.
배타적인 상류층끼리의 결속은 중간계급의 부상에 대한 반동적인 움직임이었다. 폐쇄적이었던 전통 엘리트 계급은 가능한 한 중간계급과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중간계급이 엄청난 부를 축적해 가면서 그들과 연합하는 일이 불가피해졌다. 이제 젠트리, 중간계급, 귀족이 결혼을 통해 연합하게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연합체는 기존의 사회적 위계를 흔들게 된다. 상층 중간계급은 막강한 부를 앞세워 과거에는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귀족들의 영역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자신이 진정한 지배계층이라고 믿는 전통 엘리트들은 상류사회로의 진입을 꾀하는 사람들과 자신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구별 짓고자 했다. 그래서 형편없는 매너를 갖춘 벼락출세자들과 부딪힐 가능성이 없는 ‘배타적인 공간’들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알맥스(Almack’s)로 대표되는 런던 상류층 회원제 클럽들이 생겨났고, 프랑스 혁명을 겪은 19세기 초가 되면 그런 클럽들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매우 영국적인 현상으로 불리곤 하는 ‘클럽’의 기원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커피하우스에서 토론하던 사람들 가운데 특정한 정치 이념 혹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모이면서 점차 회원제로 운영되며 클럽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런 클럽들은 20세기 학자들이 ‘공론장(Public Sphere)’이라고 부르게 될 여론 형성의 구심점이자 “계몽운동의 공화국들”이 되어 갔다. 신사들은 가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 도피처에서 술을 마시고, 정치가의 뒷공론을 하고,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남성들끼리의 우정을 쌓아 갔다.
가장 중요한 규칙은 회원의 자격에 관한 것이었다. 클럽에 가입하는 일은 철저히 소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기존 회원 중 누군가가 가입을 제안해야만 신입 회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후 지원서를 제출하고 또 다른 회원이 보증한 후 전체 회원이 승인하는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지원자에게는 가입 전에 ‘게스트’의 신분으로 해당 클럽에 한두 번 방문하는 일이 권장되었다. 어떤 클럽은 지원자의 가입을 승인하기 전에 그를 시험하거나 수습의 기간을 두기도 했다.
젠틀맨스 클럽은 회원들에게 에티켓 준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남성을 위한 에티켓(Etiquette for Men)’에 실린 클럽 에티켓의 핵심 항목들을 살펴보자.
―클럽 회원들끼리는 엄격한 격식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소통해야 한다.
―지나치게 자신을 내세우거나 나서지 마라. 자연스럽게 우정이 쌓이도록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라.
―회비를 제때 내야 한다. 식당이나 카드룸 등에서 빚을 졌다면 곧바로 갚아라.
―클럽의 명성과 위엄을 보존하기 위해 잘 행동해야 한다.
―회원이 아닌 손님이 클럽을 방문할 때는 초대한 회원이 손님의 제반 행동을 책임진다.
―클럽 하인에게는 팁을 주지 않는다.
―회원의 자격을 사업 혹은 유사한 청탁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마지막 항목이 특히 흥미롭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회원의 영향력을 이용해서도 안 된다. 젠틀맨스 클럽 대부분은 비즈니스나 기타 문제로부터의 피난처이다. 따라서 당신이 비즈니스를 하려 한다면 명문화되지 않은 법을 어기는 셈이다”라는 보충 설명까지 달려 있다. 이 규정은 클럽에서의 사교가 사적 이익 추구를 배제한 순수성을 지향한다는 원칙을 천명한다. 하지만 이해관계와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교류의 장으로서의 클럽은 그저 이상일 뿐이다. 폐쇄적인 사교 모임이 불러온 심각한 폐해를 역사는 이미 오랫동안 증명해 오지 않았는가.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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