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도 칼럼] 자유천에서 묻는다
지금 먹는 배추 감자 귤 그 덕, 과학 DNA 꽃피울 준비는
자유천을 지난 18일 또 찾았다. 1953년 8월 18일 돌아가신 어머니 곁을 지키지 못한 아들의 회한이 담긴 샘이다. 아들은 어머니를 그리며 우물을 파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아침마다 이 우물물을 받아 세수하고 돌두꺼비 화분에 수련을 키우는 등 주변을 관리하며 하루를 시작했단다. 지금 자유천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양 옆의 ‘慈乳泉’(자유천) 석비와 알림돌이 사연을 전한다.
그 아들은 ‘한국 근대농업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다. 지난 9일 부산 동래구 우장춘기념관에서 동래구청과 부산과학기술협의회가 마련한 우 박사 서거 65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우장춘기념관은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듬해인 1999년 10월 개관했다. 1·2층으로 꾸민 전시실과 우 박사 흉상, 자유천으로 이뤄진다. 1898년 일본에서 태어난 우 박사는 1959년 8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그 속에 격동의 근현대사와 불굴의 의지로 삶을 개척한 인간사가 담겼다. 역사에서 미래를 보고, 사람에게서 내일을 여는 힘을 얻는다. 역사 해석 갈등으로 사상 초유의 반쪽 광복절 경축식이 열렸다. 자유천을 다시 찾은 이유다.
우장춘기념관 해설사는 우 박사를 “씨앗 할아버지, 고무신 할아버지, 불독 할아버지”라고 설명했다. 지금 먹는 배추와 감자, 귤이 그의 종자(씨앗) 개량 노력 덕분이다. 그는 언제나 작업복과 검정 고무신 차림이었다. 이게 겉모습이라면 연구를 향한 집념은 불독 이미지로 나타났다. 얼핏 접근하기 힘든 과묵한 표정을 빗댄 것이기도 하다.
역사를 더해야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의 아버지는 우범선, 명성황후 시해 사건 연루자다. 일본으로 도피한 우범선은 현지 여성 사카이 나카와 결혼했다. 첫 아들이 우 박사다. ‘역적의 아들’이란 꼬리표는 우 박사가 짊어진 짐이다. 어머니는 그에게 차별과 소외를 견디는 가르침을 내렸다. 민들레의 교훈이다. “민들레는 아무리 짓밟혀도 끝내는 꽃을 피운다. 네게 괴로운 일이 많겠지만 굴하지 말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도쿄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과정에선 식민지 청년의 설움을 겪었다. 도쿄제국대학 부설 전문대 격인 농학실과 입학부터 조선총독부 입김이 작용했다. 교육 받을 기회를 줄테니 총독부가 지정하는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농학실과를 졸업하고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하며 육종학에 전념한 그가 이뤄낸 성과가 ‘종의 합성’ 논문이다. 같은 종(種)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당시 학계 정설을 뒤집고 종은 달라도 같은 속(屬)의 식물을 교배하면 전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음을 입증했다.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만든 유채가 예다. ‘우의 트라이앵글’이다. 이 논문으로 그는 도쿄제국대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거듭 났다. 차별의 역설이다.
광복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일제 패망을 내다본 그는 5년 동안 무직으로 지내다 1950년 3월 한국행을 단행했다. “저는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런 각오로 일본인 어머니와 아내, 여러 자녀를 두고 혈혈단신 고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보내온 환국 비용 100만 엔(일본 고위 공무원 5년치 연봉)을 가족에게 한푼도 주지 않고 종자와 서적, 실험기구 사는데 썼다.
1950년 5월 우장춘기념관 근처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을 시작으로 1959년 타계할 때까지 씨앗·고무신·불독 할아버지로 살았던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일본으로부터 종자 수입이 끊기면서 농업 기반이 붕괴될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도 배추와 무, 감자, 귤 종자 개량에 매달렸던 그의 과학 DNA다.
우린 그 과학 DNA를 얼마나 잘 계승하고 있는지 자유천에서 묻는다. 부산에 우장춘기념관이, 우장춘로(미남교차로~금강식물원)가 있다고 다가 아니다. 그 훌륭한 바이오테크놀로지(BT) 씨앗을 제대로 꽃피울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부산과학기술협의회가 부산의 과학 선현으로 꼽은 이가 장영실 장기려 우장춘 등이다. 이렇게 씨앗에 물을 주고 싹을 키웠으면 그 다음 순서는 분명하다. 학계와 기업과 대학을 연계한 지·산·학 토대에서 부산 브랜드로 발전시켜야 할 책무가 부산시에 있다.
우 박사는 1950년, 1958년(이 때 막내 사위인 훗날 교세라 회장 이나모리 가즈오를 만났다) 등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일본에 갔다. 유독 어머니 사망 땐 출국 허가를 받지 못했다. 당시 첨예했던 한일 독도 분쟁이 한 원인으로 꼽힌다. 어머니 위령제를 지내는 그를 위로하며 전국에서 조의금이 쏟아졌다. 그 돈으로 만든 우물이 자유천이다.
정상도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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