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 史淵]테러? 의열투쟁이었다

기자 2024. 8. 1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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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이토 암살 놓고
일본 교과서의 시선은 다양
한국병합 ‘계기’로 설명하다
1990년대 초반 이후에 변화
민족·의병운동가 표현 늘어
‘조선 근대화’ 방해자로 간주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 서술
김원봉이 주도한 ‘의열단’
일제에 대항 암살파괴 활동
‘주와 종을 혼동’ 비판받자
민중 무장역량 강화로 전환
윤봉길 의거가 돌파구 제공
군사학교서 청년투사 배출
독립전쟁에 나설 간부 양성

일본어 구글 위키피디아에서 안중근을 검색하면, 그는 “대한제국(한국)의 독립운동가, 테러리스트이고,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암살자이다”라고 나온다. 반면에 한국어 구글 위키피디아는 그를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정치 사상가’로 소개하고 있다. 테러리스트, 암살자라는 규정이 없다. 안중근에 대한 이같은 상반된 평가는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그의 행위를 역사에 자리매김하는 문제와도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이토 암살, 한국병합의 실마리이자 계기?

한국은 안중근 의거를 의병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계속 설명해 왔다. 이는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후 일본 검찰과 재판정에서 진술한 일관된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안중근은 이토가 한·일 간 친선을 저해하고 동양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이어서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죽였지 결코 ‘자객’으로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의병 자격으로 죽인 행위이니 자신을 ‘국제 공법’에 따라 ‘포로’로 취급하라고 일본 측에 요구했다. 안중근은 선명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처벌 대상을 분명히 하고 제재(制裁)를 가했다고 떳떳하게 밝힌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그를 암살자 또는 테러리스트라고 하지 않는다. 안중근은 한국에서 의열투쟁이라는 독립운동 방식을 개척한 사람이다.

반면에 일본은 안중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양한 듯하다. 길게 보면 그를 보는 시선에 한 차례 큰 변화가 있기도 했다. 지금까지 수백종이 발행된 역사교과서를 가지고 그들의 생각을 압축해 보자.

일본에서는 1910년 직전, 곧 한국병합 직전의 일본사를 설명할 때 안중근 의거를 언급한다. 물론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역사교과서도 있었다. 그런데 안중근의 행위를 언급한 대부분의 역사교과서에는 공통된 기술 방식이 있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일을 ‘계기(きっかけ)’로 일본 정부가 한국을 병합했다고.

일본어 きっかけ는 일을 시작하는 단서, 실마리, 원인, 동기, 계기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들어간 문장은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행위가 한국병합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의미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실제 안중근의 이토 암살 등이 도리어 한국병합을 앞당기게 했다고 기술한 고교 일본사 교과서도 있었다. 이 교재는 한때 교과서 시장을 주름잡았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한국병합의 책임을 안중근에게도 떠넘기려는 관점을 숨기고, 일본 자신을 침략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게 한다. 연장선상에서 암살이란 단어도 주저 없이 동원했다. 반대로 저격, 사살이란 말을 사용한 경우는 없었다. 이렇게 하면 의거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고 안중근이 사람을 죽인 ‘살해범’이 된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경을 지나며 역사교과서 서술에 큰 변화가 있었다. 당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고 고노 담화 등 한·일 역사갈등이 새로운 전환 국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이즈음 검정을 통과한 역사교과서에서 きっかけ라는 말은 사라졌다. ‘민족운동가’ ‘의병운동가’ 안중근이란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그의 행위가 항일독립운동의 일환이었음을 함축하는 서술이 늘어난 것이다. 관련하여 ‘사살’이란 용어를 쓴 교과서도 많아졌다.

심지어 2024년 검정을 통과한 우익 역사교과서도 きっかけ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안중근을 민족운동가라고 표현한 교재도 있다(지유샤). 대신에 좀 더 큰 틀 속에 대놓고 의거를 집어넣는다. ‘조선의 근대화’를 이토 통감이 추진했고, 한국병합은 정당했다고(레이와, 이쿠호샤, 지유샤의 교재). 이들에게 안중근은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한 사람이다. 이는 민족문제를 묻어 버리고 시혜자인 척하는 서술이다. 반면에 세 출판사의 교재는 일본군이 1894년 동학농민군과 1909년 호남의병, 1920년 북간도의 독립군과 1930년대 초반 항일유격대를 토벌한다며 반복적으로 주민을 학살한 습관성 테러행위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안중근 의거와 한국병합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서술은 역사적 사실과도 어긋난다. 일본 정부가 한국병합에 관한 문서를 작성해 내각회의에 안건으로 상정하고 검토하기 시작한 때는 1909년 3월이었다. 이토 통감도 4월 들어 한국병합에 동의했다. 조속한 한국병합에 미온적이던 이토는 6월에 사퇴의 형식을 빌려 통감에서 물러나야 했다. 한국병합을 밀어붙이던 일본 정부는 7월6일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병합을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같은 날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선후 바뀐 사실, 한국병합 추진 결정과 의거

이어 한국병합의 순서와 방법도 결정한 일본 정부는 세 가지를 곧바로 추진했다. 대한제국의 사법 및 감옥에 관한 사무를 통감부에 위탁하게 했다(기유각서). 이로써 일본은 한국인을 마음대로 처벌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일본 정부는 ‘남한 대토벌 작전’이란 특별 계획을 세워 9월1일부터 10월30일까지 2개 연대를 동원해 호남의병을 소멸시키는 군사작전을 벌였다. 그 결과 의병운동 세력 사이에서 유의미한 조직적 저항력은 제거되었다. 군사작전을 막 시작한 9월4일에도 청 정부와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일본은 국경을 명확히 하는 한편, 간도 조선인에 대한 재판권 요구를 포기함으로써 열강과 청이 한국병합에 관여할 여지를 차단했다.

결국 일본 정부 입장에서 안중근 의거는 한국병합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안팎에서 터 닦기를 끝내가는 시점에 일어난 돌발사건이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저항의 결과가 손에 잡히지 않고, 독립운동이 크게 위축되어 있어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때, 안중근 의거는 독립운동의 기폭제이자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의열투쟁에서 조직적 민중 무장투쟁으로

3·1운동 이후에 안중근처럼 결사적 태세를 강도 높게 표출한 사람이 크게 늘었다. 하지만 좀 달랐다. 개인의 단독행동보다 특정 단체의 조직원으로 활동한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며 의열투쟁의 한계를 점차 자각하고 변화를 모색했다. 의열단이 그 보기이다.

김원봉은 ‘결사의 대원과 폭탄의 위력’으로만 일본을 축출할 수 있다며, 의열단만이 이를 완수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와 의열단은 칠가살(七可殺)의 처단 대상과 다섯 부류의 파괴 대상을 상정하고 활동했다. 한마디로 일본제국주의자와 통치기관, 친일파, 곧 ‘민족의 적’을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특정했다. 개인의 사적 감정을 반영하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는 보통의 일본인 민간인조차 처벌 대상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칠가살 대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들을 비판하는 사람은 당대에도 있었다. 비판자들은 독립운동이 ‘정치상 경제상 기타 각 방면의 현상, 제도, 조직, 이민족의 통치권을 파괴’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특정 개인과 건물을 대상으로 삼는 활동의 의의와 가치를 인정하나, 그것이 독립운동의 유일한 지점이고 전체 방침이라 보는 데는 분명히 반대했다. 의열단이 주와 종을 혼동한다는 비판이다.

의열단도 비판을 의식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암살파괴운동이 ‘시기와 환경의 필연한 형편과 정세하에서’ 전개된 활동이었음을 인정하고, ‘민중조직과 조직적 군사행동’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갔다. 1927년, 1928년 민족유일당 결성 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그들은 제도를 수호하는 일본 군대와 경찰의 무장역량을 민중의 무장투쟁으로 해체해야만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해 15년전쟁을 시작하자 이들에게 다시 한번 변신의 기회가 왔다. 중국 침략을 규탄한 윤봉길 의거는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했다. 의열단은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일환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1932~1935)를 운영해 새로운 청년투사를 배출했다. 우리가 아는 ‘광야’라는 시의 작가인 이육사가 1기생이었다. 김구도 전환을 모색했다. 그는 특무공작 대신 ‘노동자·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여 독립전쟁을 벌일 계획이었다. 중국 정부의 협조를 받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1934~1935)을 설치했다. 윤동주 시인의 친구인 수필가 송몽규가 잠시 한인특별반에 있었다.

이렇듯 의열투쟁은 막힌 국면을 적극 돌파하며 새로운 출구를 만드는 독립운동의 기폭제였다. 의열투쟁을 추구한 사람들은 취약한 대중적 확장성을 극복하고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미래의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변신해 갔다.

신주백 역사학자

신주백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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