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터법’ 주도했던 그때처럼…‘나만 따르라’는 프랑스식 평등 올림픽[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

기자 2024. 8. 1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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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파리올림픽과 프랑스 유산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데카르트·라그랑주·라플라스·파스퇴르·마리 퀴리…과학의 역사만 돌아봐도 중요한 길목마다 프랑스 인물 등장
프랑스가 남긴 가장 큰 유산 미터법, 지금은 ‘측정의 기준’이 되었지만 세상 사람들에겐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친환경 내건 이번 올림픽, 무에어컨·저육류 등 관련 부대비용 참가국들에 떠넘겨…그들이 추구하던 평등은 가난한 나라에는 불평등으로 돌아갔다

얼마 전에 폐막한 2024 파리 올림픽 덕분에 올여름에는 전 세계적으로 프랑스와 파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프랑스는 누가 뭐래도 문학, 예술, 철학, 과학, 정치 등 인간 사회 전 분야에서 인류사에 지우기 힘든 발자취를 남긴 나라이다. 과학의 역사를 돌아봐도 정말 많은 프랑스의 인물들이 중요한 길목마다 등장한다. 기억나는 대로 몇명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론이라는 새로운 사유체계를 제시해 근대 과학을 태동시킨 과학혁명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지금 우리가 공기처럼 사용하는 데카르트 좌표계도 데카르트가 도입한 것이다. 뉴턴이 등장한 이후로는 이른바 ‘뉴턴주의’를 다른 사회 분야에 적극 적용해 큰 성과를 보기도 했는데, 볼테르도 그중 한 명이었다. 볼테르는 뉴턴의 방법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해 계몽주의 사조를 이끌기도 했다. 볼테르와 연인 관계이기도 했던 에밀리 뒤 샤틀레 후작부인은 최초의 근대적인 여성과학자로 수학과 언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이런 재능은 예컨대 복잡한 기하학을 이용해 라틴어로 쓴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데에 제격이었다. 이들보다 약 한 세대 뒤에 등장한 라부아지에는 산소가 새로운 종류의 기체임을 밝히고 올바른 연소이론을 제시했으며 근대적인 화학체계를 확립해 ‘화학혁명’을 완수했다. 징세조합의 간부로서 조합장의 사위이기도 했던 라부아지에는 로베스피에르 주도의 공포정치기였던 1794년 단두대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뛰어난 수학자들은 뉴턴의 역학체계를 보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다듬기도 했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라그랑주는 자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라그랑지안이라는 물리량으로부터 일반적인 물리계의 운동방정식을 쉽게 유도하는 역학체계를 제시했다. 라그랑지안은 어떤 계의 운동에너지와 퍼텐셜에너지의 차이로 주어지는 양으로서 그 계의 모든 동역학적 정보를 담고 있다. 라그랑지안에 대한 시간적분을 작용(action)이라 하는데, 이 양을 최소한으로 만드는 경로를 따라 물리계가 변화한다. 이를 최소작용의 원리라 한다. 이 원리를 수학적으로 구현한 방정식이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이다. 즉, 어떤 물리계의 라그랑지안을 구해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을 적용하면 그 계의 운동방정식을 곧바로 얻을 수 있다. 라그랑지안은 현대물리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라그랑주는 라부아지에를 구명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결국 실패한 뒤 “그의 머리가 잘린 것은 한순간이지만 저런 똑똑한 머리를 만드는 데는 100년이 걸려도 불가능하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뉴턴이라 불렸던 라플라스는 수리물리학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라플라스 방정식, 라플라시안, 라플라스 변환 등 그의 이름이 붙은 용어도 많다. 라플라스는 그의 역작 <천체역학>에서 뉴턴역학을 집대성해 천체운동 전반으로 확장시켜 적용했다. 라플라스는 뉴턴역학의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파리 군관학교에서 나폴레옹을 가르치기도 했던 라플라스는 훗날 나폴레옹 정부에서 아주 잠깐 내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반도체 설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멀티코어 프로세서의 아버지라 불리는 짐 켈러는 최근 국내 언론사와의 인터뷰(조선비즈, 6월10일)에서 인공지능의 시대에 다음 세대에게 예술과 기초과학을 가르쳐야 한다며, 자신이 배운 최고의 것들로 라플라스 변환과 푸리에 변환을 꼽았다. 푸리에 변환은 어떤 함수를 다양한 주파수의 주기함수로 분해하는 변환(또는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파수 영역의 함수 자체를 얻는 과정)으로 통신이나 영상신호 분야에서 다양하게 응용된다. 푸리에 변환을 발견한 푸리에 역시 18~19세기에 활동했던 프랑스의 수학자이다.

푸아송은 라플라스 방정식을 일반화한 푸아송 방정식을 개발했다. 중력과 전자기력의 퍼텐셜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방정식이 푸아송 방정식이다. 최근에는 물리학자들이 푸아송 방정식의 지배를 받는 대전입자들의 운동으로부터 이미지를 생성하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 모형에는 ‘푸아송 흐름 생성모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푸아송은 또한 푸아송 괄호라는 표기법을 개발해 고전역학을 새롭게 기술했다. 놀랍게도 푸아송 괄호는 훗날 양자역학의 근간을 이루는 교환자의 모태라 할 수 있다.

독일의 코흐와 함께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파스퇴르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파스퇴르는 S자로 굽은 목을 가진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생명체가 자연환경 속에서 저절로 생긴다는 자연발생설을 반박했다. 또한 와인 발효의 원인이 효모균임을 확인했으며 발효와 산패는 다른 미생물의 작용결과임을 알아냈다. 이로부터 저온살균법을 개발했다. 이후 파스퇴르는 닭 콜레라, 탄저병, 광견병의 백신을 개발했고 면역의 원리를 규명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마리 퀴리는 폴란드 출신의 이민자 여성으로 방사능에 관한 연구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1903, 공동)과 노벨 화학상(1911, 단독)을 수상했다. 같은 분야에서 2차례 수상한 경우(물리학상의 존 바딘, 화학상의 프레데릭 생어와 배리 샤플리스)도 있고 화학상과 평화상을 수상한 경우(라이너스 폴링)는 있지만, 서로 다른 분야의 과학상을 복수로 수상한 경우는 마리 퀴리가 아직도 유일하다. 그의 딸인 이렌 졸리오 퀴리는 남편인 프레데릭 졸리오와 함께 알파입자를 이용해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합성한 공로로 1935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가 인류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을 꼽으라면 나는 미터법의 제정을 추천하고 싶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층이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도량형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난 뒤에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새롭고도 통일적인 도량형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길이의 기본단위 명칭으로 ‘미터’를 도입했다. 초기에는 파리를 지나는 사분자오선(북극에서 파리를 지나 적도에 이르는 최단거리)의 1000만분의 1을 길이의 기본단위로 정했다.

프랑스는 미터법 도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1870년에는 국제미터위원회가 출범했고 1875년에 17개국이 미터협약을 체결했다. 1889년에는 제1차 국제도량형총회가 열려 백금-이리듐 합금으로 만든 금속막대를 미터원기로 지정해 그 길이를 1미터로 정의했다. 질량의 기본단위로는 역시 백금-이리듐 합금으로 제작한 원기둥 모양의 킬로그램 원기의 질량으로 정의했다. 이들은 모두 인간이 임의로 만든 물체를 기준으로 정한 값이라 그 절대적인 값이 변한다든지 하는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1960년에는 크립톤86 원자가 방출하는 주황색 빛의 파장을 기준으로 1미터를 정의했다가 1983년에는 광속을 기준으로 1미터를 정의했다. 시간의 기본단위는 1967년 세슘133 원자가 방출하는 빛의 주기를 기준으로 정의되었다. 이들은 모두 자연표준이었으나 킬로그램은 21세기까지도 여전히 금속 원기가 정의의 기준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2019년에 이르러서야 플랑크상수를 기준으로 킬로그램을 새롭게 정의했다. 아울러 다른 단위를 정의할 때에도 광속 등의 자연상수를 아예 정의된 값으로 정하고 그에 맞춰 미터와 초 등을 재정의했다.

프랑스가 미터법 제정을 주도했던 사실을 떠올려 보면, 자기들이 세상의 기준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따르라고 하는 성향이 미터법과도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프랑스의 이런 모습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아마도 프랑스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의 21세기적인 의미를 이번 개회식 행사를 통해 제시했던 것 같다. 사실 사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야외 개회식은 말 그대로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개막공연에 대해서는 전 세계적으로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다. 성평등과 자유의 메시지가 꼭 그런 식으로 표현됐어야 했는지, 전 세계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이것이 프랑스식 자유와 평등이라는 선언과 암묵적인 강요가 앞선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모두 떨치기는 어려웠다.

이런 의구심은 대회조직위원회가 친환경 저탄소의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무에어컨과 저육류 식단이라는 자기들만의 기준을 각국 선수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사실 때문에 더 커졌다. 의도했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관련 부대비용은 프랑스가 아닌 다른 참가국들이 짊어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가난한 나라의 선수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올림픽 경기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가 추구했던 평등이 현실에서는 매우 잔인한 불평등으로 나타난 셈이다. 센강의 영광을 위해 선수들의 건강을 나 몰라라 한 처사는 옛날 제국주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프랑스의 이런 이중성이 내재한 모순은 작년 알제리계 10대 소년이 경찰 총에 사망한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프랑스의 톨레랑스는 왜 이민자들 앞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그럼에도 올림픽을 완벽하게 운영했다면 최소한의 경외심은 느꼈을 텐데, 우리의 국호를 잘못 부른 것이나 오륜기를 거꾸로 매단 일이나 기타 크고 작은 진행상의 실수를 보면서 프랑스라는 선진국의 본모습은 이렇게 엉성한가 하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지난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유럽의 선진국들과 미국, 일본이 그렇게까지 ‘선진적’이지는 않은 본모습을 우리는 많이 봐 왔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파스퇴르의 나라에서 백신 거부감이 컸던 것도 놀라웠다. 참 얄궂게도 코로나19 백신을 초기에 개발한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의 CEO 파스칼 소리오와 미국 모더나의 CEO 스테판 방셀은 모두 프랑스 출신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중반까지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이 백신을 개발했을 때 프랑스에서 백신을 개발한 회사는 없었다.

그래도 프랑스가 부러운 몇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2차 대전 때 나치에 협력했던 인사들을 철저하게 응징한 일이다. 우리 정부가 일본에 조선인의 사도광산 강제징용을 따져 묻지 않고, 친일논란이 있는 인사가 독립기념관장에 임명되고, 지하철역의 독도조형물이 사라지는 지금의 한국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천문학적인 돈이나 최첨단의 기술이 필요한 일도 아닌데, 우리에겐 그게 가장 어렵다는 현실이 서글프다.

■이종필 교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이종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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