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시장 속 빛나는 가게… 장볼때 ‘女기어때!’ [장다르크 이야기①]
여성의 경제활동은 최근 10년간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증가하고 있다. 2013년 2천157만6천명이였던 여성 근로자는 꾸준히 증가해 지난해에는 전체 근로자(4천540만7천명)의 절반이 넘는 2천304만5천명을 기록했다. 이렇듯 우리나라 노동계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 근로자들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나의 이름’으로 불리며 하루를 살아간다.
생때같은 아이를 두고 나오는 속상함, 아이들이 커갈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한 미안함이 오히려 마음을 다잡고 굳세게 만드는 원동력이 돼 준다는 우리 ‘엄마’들. 나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일생을 살아온 이들은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어느새 우리나라 경제의 한 축으로써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대한민국 유통의 근간이 돼 주고 있는 전통시장. 그 속에서 빛나는 여성 상인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지난해 발표한 2022년 전통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전국 전통시장 수는 1천388개로, 경기, 인천,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지역에 383개(27.6%)가 자리했다.
이 기간 전국 전통시장 종사자는 31만6천315명으로 조사됐다. 2019년 전체 시장상인 중 63.4%, 약 20만명에 이른 전통시장 여성 점주는 2020년에도 동일한 수준을 유지했다.
이처럼 유통산업의 뿌리 역할을 하는 전통시장. 그 속에서 새벽 이슬이 마르기도 전에 문을 열고, 늦은 밤 고생한 서로를 토닥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장의 엄마’들. 이들의 삶이 녹아 있는 전통시장을 찾아 여성 상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 첫 번째 場다르크. 양평의 ‘이불박사’ 홍성옥 대표(69) 이야기
전통시장을 지켜온 여성 상인을 만나기 위해 기획취재반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양평 물맑은시장. 장대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홍성옥 자미온 대표(69)는 가게 문 밖까지 나와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홍성옥 대표는 켜켜이 쌓여있던 이불 더미를 재빨리 밀며 자리를 권했고, 어깨에 떨어진 빗물을 털어내기도 전부터 홍 대표의 수다가 시작됐다.
양평 물맑은시장에서 37년째 이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불 박사’ 홍성옥 대표는 용도별, 계절별 이불 추천은 물론 얼굴만 보면 취향도 알아차리는 명실상부 이불 전문가다. 이런 홍 대표는 사실 이불 박사이기 전 한 평생을 양평 물맑은시장에서 살아온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홍성옥 대표는 “내가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내가 이 시장이랑 역사를 같이 했다고 봐도 되지. 나야 뭐 여기서 나고 자랐으니까. 1956년에 양평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아버지가 이 시장에서 쌀가게를 하셨어. 그래서 걸음마 떼고 나서는 아버지 보러 시장도 자주 오고. 그땐 내가 시장에 뜨면 그렇게 아줌마 아저씨들이 너무 귀여워해 주고 그랬지”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홍 대표는 “내가 어렸을 때야 시장이 최고였으니까. 물건도 많고 가격도 저렴하고. 그러다 보니 사람이 물밀듯이 많았지. 오죽하면 점포가 없어서 가판을 두고 장사하는 분들도 있었고 서로 부딪히고 밀리면서도 장을 봤으니까. 명절이라도 되면, 말도 못 하게 사람이 많았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다고 할 정도였다니까.” 그가 어렸을 적 양평 물맑은시장은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큰 소리로 손님을 끌어모으던 상인들과 그 사이에서 유심히 물건을 고르는 손님, 그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다니던 배달 오토바이까지 어우러져 때론 위험하기도 했지만 매일이 장날인 것처럼 북적이는 그 느낌이 좋았다고 한다.
결혼 후 이불 가게를 개업했을 무렵 전통시장에는 ‘여성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 또래 여성 점주가 운영하는 가게가 늘기 시작했고, 그때 홍 대표에게는 언제, 어떻게 친해진 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자매 같은 존재들이 생겨났다. 홍 대표는 “피를 나눈 자매는 아니지만, 함께 구슬땀을 나눈 사람들이 생겼고 힘들 때 곁에 있어 주고, 기쁠 때 손뼉 쳐 줄 수 있는 언니 동생이 수십명”이라며 호탕한 웃음을 뱉었다.
이런 시원시원한 성격에 시장 상인은 물론 손님과도 끈끈한 관계가 됐다. 시대 흐름에 따라 인근에 크고 작은 할인점들이 들어설 무렵 찾는 이가 줄긴 했지만, 홍 대표와 시간과 추억을 나눈 단골들은 여전히 시장으로 발길을 옮긴다고 한다. 20년, 30년 시장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단골에게 고마운 마음이 큰 홍 대표는 평생을 함께한 물맑은시장이기에 ‘손님을 끌어모아 시장을 지키자’는 마음으로 쉬는 날도 줄여가면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홍 대표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양평 물맑은시장을 떠나본 적이 없을 정도로 시장은 나한테 또 하나의 집 같은 곳이야. 어쩌면 시장에서 보낸 시간이 집에서 보낸 시간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고. 지금이야 시장을 대신할 수 있는 곳이 많다지만, 그래도 시장은 다른 곳들이랑은 다르게 ‘사람 냄새’가 나잖아. 정겹고 편안하고. 어떻게 보면 내 인생이라고도 볼 수 있는 전통시장이 오래도록 살아남아서 다음, 그다음 세대랑도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라고 맺었다.
■ 두 번째 場다르크. 안성의 ‘패션왕’ 최인영 대표(67) 이야기
다음 여성 상인으로는 안성에 위치한 안성맞춤시장에서 10년째 옷 가게를 운영하는 최인영 패션왕 대표를 만나봤다.
최인영 대표는 올해로 67세, 여성 상인 중 나이로는 선임이지만, 옷 가게 패션왕을 운영한 지는 아직 10년밖에 안 된 ‘맏내’(막내 같은 맏이를 일컫는 신조어)다. 시장에서 가게를 연 지 1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10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고 한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동안 가게를 운영했지만, 아직 사업경력으로는 시장에서 오래됐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업력 선배들이 많다”면서 “10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코로나19 같은 온갖 일을 겪었어도 시장 선배들에게 배울 것도 많다”고 한다.
10년 전 적지 않은 나이에 그가 시장에 들어선 건 ‘꿈’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원래는 직장인이었어. 그냥 일반 회사. 부족할 것도 넘칠 것도 없이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살았는데, 아이 낳기 전에는 부업도 하고 했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내 일을 하지 않아 그런지 무능력하다’라는 느낌을 받았지. 그런 기분이 좋지 않기도 했고 그래서 우울해지니까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 엄마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내 일을 해서 보탬이 돼야겠다. 그런 생각을 해”라고 말했다.
꿈 하나로 뛰어든 옷 장사였기에 시작이 쉽진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함께 고생하는 주변 여성 상인들과 단골들을 보면서 마음의 안식처를 찾았고, 최 대표에게 안성맞춤시장은 단순히 일터가 아닌 여러 의미를 지닌 공간이 됐다고. 최 대표는 “일만 하려고 출근하면 못 버텨.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간단한 요깃거리도 챙기고, 오늘은 반찬가게 사장님네 들려야지, 내일은 신발가게 사장님네 들러야지 이런 소풍 가는 마음으로 다니니까 벌써 가게를 연 지 10년이나 흘렀지”라고 했다.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던 그는 “글쎄. 가게 문을 열었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만 해도 참 여자에 대한 인식이 고리타분했지. 여자는 배움이 짧다. 어디 여자가 감히. 뭐 이런 말들 있잖아. 그런 말이 이상하지 않을 때였으니까. 근데 10년밖에 안 지났는데 요즘 그런 말 하면 못 쓰는 세상이 됐잖아”라며 웃음 지었다.
개인 사업을 하는 남편이 종종 거들 때도 있지만, 남편이 바쁠 때면 시장 사람 간 도움을 품앗이하면서 더욱 끈끈해지기도 한다. 그는 “남편이 사업하면서 바쁘니까 갑자기 옷이 배달오고 그러면 주변 상인들이랑 영차영차 하면서 옮기고 그러지. 시장 사람들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해. 여자들이라 다들 처음에는 눈치 보면서 시작했겠지만, 지금은 서로에게, 이 시장에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됐으니. 내가 어렸을 적엔 여자가 일을 한다는 게 어려웠잖아. 애도 키워야 했고. 그런데 지금은 여자들이 가진 재주를 원 없이 부릴 수 있는 시대가 됐으니 얼마나 좋아”라고 말했다.
장사를 하면서 쏜살같이 지나간 10년 동안 최 대표는 크게 느낀 점이 있다고. 최인영 대표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으로 ‘여자는 나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강했던 거 같아. 그렇게 세상 안에서 온실 속 화초 취급을 받던 여자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니 세상을 오히려 더 윤택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여자는 강해. 물론 나도 강한 여자고”라고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기획취재반
이호준 기자 hojun@kyeonggi.com
이대현 기자 lida@kyeonggi.com
이지민 기자 easy@kyeonggi.com
금유진 기자 newjeans@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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